2013.4.29 낯설지 않은
그 무렵의 나는 학교 이름이 새겨진 잠바를 사고 싶지 않았다.
그 무렵 스무살의 가슴에는 미성숙한 부끄러움이라는게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학교에 대한 소속감을 부인하고 싶었던 것과 서자의 슬픔 같은 것 때문이었다.
디자인이나 색감이나 실용성 따위의 이유를 들어가면서까지 내면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고자 했음은
학교가 내게 유일하게 준, 동기들을 아껴서 였고 그들의 생각을 존중해서이기도 했다.
요근래 나는 역시 학교 이름이 새겨진 잠바를 사고 싶지 않다. 모순적이지 않은가.
잠바에 박혀 있는 이름은, 어쩌면 가장 숨기고 싶었던, 그러나 늘상 존재했던 밑바닥에서 꿀렁거리는 본능으로써 가장 원하던 이름이 아닌가.
그것은 내 노력의 결과가 가시화되기 위함이라는, 지나치게 속물적인 모습으로 내 자신이 비춰지는게 싫어서 ,
또한 내 노력의 목적과 정착점이 고작 야구잠바에 대외적으로 학교 마크를 달고 다니는 걸로 비춰지는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부질없게도 조금 더 내 노력의 목적이 덜 속물적이길 바랬고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더 성숙한 것이길 바랬던 것이다.
그것은 위로부터 끊임없이 나를 압박하던 구시대적 사고에 대한 반발이었고 내가 적어도 그들보다는 더 낫다는 것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보여주고 싶음이었다. 어쩌면 오만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치기였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그것은 너무도 중요한 치기이다.
어제는 뭘 입었으니 오늘은 무엇을 입어야지 내일은 이것을 입을테야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학문관에 대한 문제이고 앞으로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문제이다.
나라는 존재가 실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나이가 됐을 무렵부터 내 인생은 속물적임과 정신적인 것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이었다.
비범한 주인공들을 담은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늘 그 주인공의 역경과 삶에 공감하고 그들의 사고방식에 나를 대입하며 남몰래, 감히, 사명감따위를 가졌었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이제는 그들에게 패배하고 마는 살리에르에게 공감을 느낀다. 그런 내가 지극히 인간적이라 슬프다.
나는 위인이 아니며 적당한 질투, 어쩌면 못된 야심을 갖고 있는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동시에 또 이사실을 반추할 때마다
나는 몹시도 눈물이 난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도 슬픔도 아무것도 담지 않은 담담한 눈물이다.
실상 현실세계에 진정한 위인이란 존재할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그 순간부터 나는 자기계발서를 읽지 않는다.
어차피 또 내면의 반발과 의구심은 계속 될 거다.
어차피 또 나의 삶은 모순으로 점철될테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것 쯤이야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을만큼, 무뎌져 버렸다.
그러나 일말의 희망으로 나는 또 낑낑거리며 다 녹슨 창문을 열고자 할테지.
어디서 읽은 한 구절처럼, 아주 작은 틈새의 창문에도 바람은 지나가기에.
그것이 시베리아 혹한의 바람이든 한여름에 금방 왔다 가는 잘생긴 샌님 같은 바람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