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찬란한
2013.5.12 무
선자:
2014. 5. 12. 00:47
이유가 없다.
입으로는 쉴새없이 떠들고 발로는 이 땅을 밟아대면서
고단하게 보낸 하루가 끝이나면 나는 이유가 없어진다.
그들과 만날 이유가 없어지고
갖은 치장을 해가며 내둘렀던 혀도, 표정도,
무심코 내뱉었던 한마디에도,
이유가 없어진다.
처음에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에 수치스럽다가도
금세, 그마저도 이유가 사라진다.
얼굴을 붉힐 이유가 사라진다.
무상無常이어라.
그 끝은.
이유가 사라질 때마다 나는 완전한 무無를 꿈꾼다.
내 가슴이 깜깜한 밤 하늘로 채워지길 바란다.
이유가 없어서 이유를 붙잡기 위해.
이유를 붙잡아야 이유를 완전히 놓아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야만 나라는 존재가 깜깜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사람은 자취가 너무 많다. 말 글 표정 냄새,
나는 가끔 그 자취들이, 내 자취들이 타인에게 남아 있다는 것이 사무치게 싫을 때가 있다.
그래서 스스로 이유를 버리나보다. 나의 자취가 남지 않길 바라며.
미치도록 소심한 밤이다.
나는, 사람은, 가끔 이유가 없을 때가 있다.
이유가 없이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고
이유가 없이 곡기를 끊고 싶을 때가 있고
이유가 없이 너를 만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마저도 이유가 없다고 답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세상이 나에게서 이유를 필요로 한다면
그저 조금 피곤해서, 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네 물음에도 이유가 없음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