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6.2 ㅖ여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냇가 중류에 살고 있는 나는 냇가 하류쪽으로는 자주 가지 않는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딱히 볼것도 갈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혹 갈 때가 있는데 어느날 그 곳에 있는 모교 앞에서 낯선 교복들이 보였다.
그 나이대의 싱그러움을 간직한 채 떠드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교에서는 축제인지 체육대횐지 아무튼 무언가가 하고 있었었나보다. 고등학교 1학년, 2학년,3학년 때 담임선생님 얼굴들이 스쳐지나갔다.
올해 초 돌아가셨다는 젊은 영어 선생님의 얼굴도 생각이 났다.
붕 떴던 가슴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덤덤하게 교문을 바라보았다. 불현듯 웃음이 났다.
그래도 대부분의 기억들이 싱그러워서, 내가 앉았을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을지 모르는 저 아이들이 싱그러워서 웃음이 났다.
기억이란 늘 추억으로 위장한 채 다가온다. 머뭇거리고 방심하다가는 그 아련함에 취해버리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스쳐지나가버린 기억과 채 이별하지 못한 자의 변명일 뿐,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에겐 과거는 위로의 수단일 뿐, 참 못나서 웃음이 나온다.
기억 속에 관계들이 있고 현재의 내가 가지는 관계들이 있다.
언제부턴가 세상을 등지고서는 살아내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관심은 간섭을 낳고 간섭은 불필요한 다툼을 낳는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건데,
상대로 하여금 변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더이상 관심이 아니다. 그것은 간섭이며 오지랖이다.
간섭은 불필요한 다툼을 낳는다. 우리는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다.
관계는 그런 것이다.
상대방에게 철벽을 쌓을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상대가 쌓아놓은 벽을 부수고 들어가서도 안되는 것이다.
관계를 맺는 것은 살아가기 위함이므로 사냥과 닮았다. 그러나 관계를 맺는 것은 그 어떤 사냥보다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
꽃이 고개를 떨구었다. 봄날이 지고 있다. 한 해의 반이 그저 그렇게 지나버렸다.
계절은 짧은데 기억의 잔향은 참 오래도록 남는다.
가끔 기억력을 탓하면서도 그것을 탓하는 이유가 좋아서인지 안좋아서인지,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이 참 우습다.
그래도 우스운 일이 있어 다행이다. 기억을 추억하고 추억을 기억하는 데 있어서 그 모든 행위들이 싱겁고 우습고 그래도, 싱그러워서 다행이다.
이 젊은 봄날에, 나는 새로운 관계들을 내적으로 외적으로 만들어 내었고 그 중심에 서서
과거의 내 관계들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조심하고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계절은 짧아도 기억은 참 길기에.
'만약'이라는 말을 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단지 기억해볼 뿐이다. 그것이 추억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H여고에서 들리는 크고작은 수군거림들과 온갖 종류의 웃음소리, 왁자지껄함을 가지고 그렇게 성큼,
여름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