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고맙습니다」
초겨울의 따뜻한 바닷 바람 냄새를 물씬 풍기는 드라마를 보았다.하루걸러 하루 천천히 마음에 차곡차곡 쌓아가며 보려 했으나,특유의 흡입력으로 이틀만에 16화를 모두 보고 말았다.
분명히 2007년,불과 몇년 전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시대극'같다는 느낌이 내내 들었던 것은
주인공들이 요 몇년 사이 익숙해져버린 스마트폰이 아닌 안테나가 있는 폴더폰을 쓰고 있어서도 아니고 시골 섬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순박한 옷차림 때문도 아닐거다.
그것은, 카메라를 통해 또 배우들의 눈빛을 통해 이 드라마를 함께 달려온 시청자인 내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옛날 어렴풋한 살구빛 기억의 회상 단편 같은 이 드라마만의 색깔이 묘하게 내 마음을 일렁이게 하기 때문일거다.
자고로 소위 말하는 '명품 드라마'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오래도록 일렁이게 하고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대사들을 되내이고 읊게 만들며, 한 사람의 삶속에서 계속 되짚도록 만드는 게 아닐까.
드라마를 보는 내내 또, 보고 난 후까지도 내 마음은 마치 샛노란 치잣물에 담뿍 잠겼다 나온 느낌이다.
나 스스로 오래도록 이 마음,이 느낌을 간직하고 싶어 몇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 드라마를 다시 느껴보고자 한다.
1)천사
-기서, "천하에 인간 말종,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올 냉정한 새끼,지 위엔 아무것도 없는 건방진 자식,그런 개차반 같던 놈을 아줌마가,봄이가,할아버지가 이렇게 바꿔놨잖아요.당신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이제 감이 와요?"
-종수,"어.여보 난데 당신 애들좀 데리구 푸른도로 좀 내려올래?…들었지? 당신이 와서 이 무지한 분들께 시범을 좀 보여드려야 겠어.애들 데리구 당장 내려와 당장! 됐습니까 인제?!"
-박씨,"이 자식이요,나랑 40년지기 친군데,헌혈이 오히려 건강에 좋다구 헌혈 광신도예요. 헌혈 증서가 10개도 넘어요, 이자식…이자식이 다행히 B형이거든요.걱정마세요 이자식이라면 두말 않구 해줄 거예요."
드라마의 주 배경인 푸른도에는 미혼모인 영신이와 영신이가 사랑하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봄이, 이 둘을 사랑했던 만큼 지금은 사랑받고 있는 아이같은 할아버지,세 식구가 살고있다. 봄이는 초등학교 1학년,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아이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드라마에서는 시작부터 주요인물들의 단순한 설정을 통해 '순수한 아이같은 마음'을 거침없이 내보이고 있다. 처음 이 드라마를 보기가 두려웠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겉으론 단순해보일지도 모르는 이런 설정때문에 보는 내내 마음 졸이고 가슴 아파 할까봐. 그러나 드라마는 이런 '(내 입장에선)겁 없는 짓'을 하였고 나는 그것에 보답하여 역시 '겁 없이' 보기 시작하였다.
나뿐만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아이=천사'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초반에도 말했듯이 이 드라마는 '아이=천사'라는 생각을 깔고 계속해서 '천사'라는 단어를 내놓는다. 처음엔 다소 부담스러운 단어였으나 이 드라마에 점차 동화되면서 나 또한 '천사'의 의미들을 하나씩 찾기 시작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천사는 '선을 이끄는 존재'로써 내가 이 드라마에서 생각하는 진정한 천사는 '영신'이다.봄이의 엄마이자 기서뿐 아니라 푸른도 사람들 모두를 선으로 이끄는 사람.
겉으론 가진 것 하나 없는 이 젊은 아이 엄마가 드라마 16회 동안 소소하게 웃고 우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선의 꽃을 피우게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드라마의 최종 결론은 '사람들 마음 속엔 누구나 천사가 살고 있다.'일수도 있겠지만 일단 그들의 '선'을 이끈건 아이같은 마음씨를 가진 봄과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을 보듬어주는 영신이 아닐까 한다.
영신을 연기하는 배우 공효진의 탁월한 연기도 한 몫하여, 천사라는 단어가 부담스러웠던 나는 어느새 천사에 영신을 대입시키곤 마음이 편안해 질 수 있었다.
2) 정 그리고 사랑 :초코파이
-기서,"키우는 개 만큼도 취급 안해주는 어떤 여자 때문에, 인생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까지 저질러 가면서,그 여자 눈물 때문에 가슴이 무너지고, 그 여자가 웃으면 세상 전부를 가진 것 같이 착각하고…나,미친 놈이에요?!"
드라마에서 영신의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렸음에도 손에서 초코파이를 놓지 않는다.초코파이는 할아버지에게 있어서 정이며 사랑이다.처음 만나는 사람이든 자신에게 해를 가하려던 사람이든 할아버지는 늘, 언제나 그들에게 초코파이를 권한다.
드라마에서 내가 가장 공감하고 와 닿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사랑'이 아닌 '사랑을 하는 법'을 아는 할아버지,그리고 그 할아버지를 통해 세상을 본 영신과 봄이 배운 것은 역시 단순한 '사랑'이 아닌 '사랑을 하는 방법'이다.
이 드라마를 보기 전에도 나는 끊임없이 아이를 가르칠 때 반드시 '사랑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줘야지 그런데 대체 어떤 말로 포장하면,어떻게 표현을 해야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었다.
그러나 영신의 할아버지를 보고 느꼈다. 그것은 어떤 거창한 '말'로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그저 작은 초코파이 하나로도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이치였던 것이다.
남을 사랑하는 방법은 간단한 것이다. 그저 나의 초코파이를 다른 사람에게 선뜻 건넬수 있는 마음씨와 용기인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것을 영신과 봄에게 가르쳐주었고 모든 것을 다 잊는 병에 걸렸어도 마음만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신과 봄은 할아버지의 그것으로 푸른도 사람들과 기서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모든 것은 사랑으로 귀결된다.
할아버지의 일방적일 것 같던 타인에 대한 사랑은 결론적으로 할아버지의 '마지막 초코파이'를 통해 타인의 마음을 울렸고 그 결과 영신과 봄은 여전히 푸른도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할아버지가 사랑의 전달자라면 봄이는 사랑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봄이는 끝부분 석현과 영신의 대화를 통해,아니 어쩌면 1화부터 은연중에 내포되어있어 시청자들만이 알 수 있듯이, '사랑'으로 만들어졌고 영신으로부터 '사랑을 하는 방법'을 자연스레 익혀 사람들을 대했다.그래서 봄이는 그 어린마음에도 자신이 에이즈로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때문에 다칠까봐 두려워 한다.
누구보다 순수한 8살 짜리 어린아이와 아이같은 마음밖에 남아있지 않은 할아버지,그리고 그 사이에서 넘쳐나는 사랑을 베푸는 영신을 통해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마지막화까지 시청자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하는 방법을 순수하디 순수하게 표현하고 있다.이 드라마가 유달리 별 것 아닌 것에도 사람의 마음을 울린 것은 너무나 순수해서 잘못하면 깨어질 것 같은 '사랑의 표현' 때문이 아닐까.
초코파이,요술코트,열무김치 … 모든 것은 사랑으로 귀결되었다.
3) 고맙습니다.
-기서,"뭐가 불쌍해? 맨날 그렇게 세상이 고맙기만 한 사람인데...나 같은 놈이 천배는 더 불쌍하지."
"그게 고마울 일이냐? 뭐가 도대체 맨날 고맙냐? 뭐가 그렇게? 등신아"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느낀 건,제목 한번 잘 지었다 이다. '고맙습니다' 늘 영신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아주 사소한 일이거나 지극히 당연한 일에도 영신은 늘,'고마워요,고맙습니다'를 말한다.
어쩌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는게 팍팍하고 세상이 자신에게 주는 시련과 고통으로 지치고 힘들 법한 영신은 기서의 말처럼 세상이 고맙기만 하다.자신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백,봄이도 있고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있고 자신들을 품어주는 푸른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영신은 '고맙습니다'를 달고 산다. 자기가 제일 잘났고 세상이 자길 버렸다고,자신을 불행하게 여기는 기서에겐 낯선 말, '고맙습니다'.
기서는 영신을 사랑하게 됨으로써 영신을 통해 세상을 봄으로써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느끼게 된다.이로써 기서의 인생에 있어 영신과 봄이와 할아버지는 기적이 된것이다.
영신은 기서에게 푸른도를 떠나면서 원망섞인 말을 내뱉는다. 세상이 아닌 할아버지에게.
이게 다 할아버지 때문이라고.할아버지가 늘 고맙게 여기라 가르쳤기 때문에 자신이 봄이에게 봄이가 장난감을 갖고 놀기 시작할 때부터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부터 가르쳤다고.근데 그러면 안되는 거라고. 할아버진 틀렸다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잘못된 교육을 한거라고.
기서는 여태껏 봐왔던 영신이의 생각과 마음이 상처입고 다친 것 같아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부정도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긍정을 말하지도 못한다. 기서 또한 영신으로 인해 변했기 때문이다. 영신은 그런 기서를 향해 매정히 돌아섰고 극은 영신의 매정히 돌아서버린 마음이 마치 옳은 것처럼 흘러간다. 그러나 영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신의 가족들에게 상처입히고 아프게 했던 푸른도 사람들이 영신과 봄,그리고 할아버지의 초코파이로 마음이 동요되어 선을 찾고 영신의 가족들에게 기적을 베푼다.할아버지는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고맙습니다' 불과 다섯글자로 이루어진 짧은 말로 영신이와 봄이,할아버지는 푸른도에 기적을 만들어 내었다.
어쩌면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사랑을 실천하고 행복을 가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조금은 더디거나 용기가 필요할지 몰라도 '고맙습니다'라는 한마디로 이뤄낼 수 있는 것임을 이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세상이 험한건 사실이나,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
4)연출과 ost
-'흔적','아코디언 theme'
드라마에서 기가막히게 멋진 풍경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작은 섬에 불과한 소박한 푸른도가 배경이기 때문이다. 간혹 밀밭이 보이고 영신이 일하는 밭,갯벌이 등장하지만 그 뿐이다. 그러나 그런 소소한 풍경조차도 아름답게 느껴지게 하는 것이 이 드라마의 힘이고 더불어 이 드라마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극 중에서 영신이 지치거나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푸른도의 길을 따라 걷고 있으면 어디선가 기서가 나타나 그 뒤를 밟는다.카메라는 기서의 입장에서,혹은 측면에서 이둘을 따라가면서 간질거리는 연출을 만든다. 이 때 어김없이 흐르는 ost가 아코디언 theme이다. 기서가 영신을 부르지도, 따라잡지도 않고 적당한 거리를 지키면서 뒤를 따라가는 모습에 시청자인 나도 덩달아 설레면서 아코디언의 선율에
따라 콩콩거린다.
푸른도와 기서와 영신의 순수하고 맑은 사랑이 음악에 투영된 것 같아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계속 들으며 그 여운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ost앨범의 타이틀 곡인 고맙습니다는 영신을 향한 기서의 마음을 담뿍 담은 곡이다.
'행복해서 우네요.목 끝에 차 있는 그말,정말 사랑합니다.' 절절한 보컬로 들려오는 애절한 가사들은 기서뿐 아니라 시청자인 내 마음 까지도 울렸다.
이 곡은 여러번 자주 나오지만 특별히 영신이 다쳐 병원에서 사경을 헤맬때, 의사로써 자신의 본분을 다한 기서가 마지막으로 신의 영역에서 간절히 기도를 하는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나는 이 드라마가 완성도가 높은 이유 중 하나를 '정말 잘 만든 마무리'로 본다. 시청자의 입장에서는,마지막회에 영신이 기서와 결혼해서 물질적으로도 행복한 모습을 보고자 하는 바램도 있었다. 그러나 연출자는 영신과 봄이 작지만 사랑이 가득한 푸른도의 집에서 까르륵거리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것으로 진정한 행복을 표현함과 동시에 기서 또한 그들의 행복에 거슬림 없이 스며들어 열려있지만 닫혀있는 묘한 결말을 내렸다.그리고 내래이션으로 영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기적을 믿는다'를 강조하고 기서의 대답을 통해 앞으로 이들의 행보에 '기적 같은 행복들'이 가득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어 생각할 수록 훌륭한 마무리인 것 같다.드라마를 곱씹을 수록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5) 푸른도 그리고 사람들 : 또 다른 선
-미스 송씨,"사랑해선 -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 - 말 못하는 이 가슴은 이 밤도 울어야 하나-"
-석현 모,"내가 책임지구 고쳐 줄게,봄아 -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니 병 할미가 고쳐 줄게."
-종수,"어,여보,나야 - 저기 있지. 나 당신한테 고백할 말이 있어. 있잖아 - 그러니까 그러니까 있지 - 나 푸른도의 장준혁이라는 말 그거 다 뻥이야. 허준도 아니고.장준혁도 아니고 이준혁도 아니고 - 그냥 돌팔이야."/"나도 아닌 줄 알았는데 - 의사 가운이 이게 내 적성인 것 같애.이게 내가 원했던 삶 같애. 이제 알았지만,"
-소란,"영신인 말하려고 했는데,제가 말렸어요.-에이즈 걸린 거 알려지면 이 동네서 하루도 살 수 없을 거라고 - 우리나라 사람들 에이즈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심한데 봄인 학교도 다닐 수 없고,친구도 잃고,모든 게 다 끝장이라고. 제가 끝까지 입 닫고 있으라 그랬어요.…영신이가 그동안 아주머니들한테 어떻게 했어요? 걔가 우리한테 어떻게 했는데 - 저보단 늘 남이 먼저고 언제 나 남부터 생각하는 애였잖아요. 한번만 좀 봐주시면 안돼요? 영신이 이 번 한번만 좀 봐주시면 안돼요?"
-보람 모,"오늘 저녁에 보람이랑 보람이 아버지랑 태창이랑 태창이 엄마랑 맛있는 김치 담궈서 니네 집에 갈려고 했었단 말야. 니가 밥도 못 먹고 있다 그래서 - 너 좋아하는 까나리 액젓 넣고 열무김치 담그고 있었단 말야. 내가!"
-두섭,"우리는 오늘 부로 진달래야 누나 - 초코파이를 먹고 핀 진달래."
-석현,"아버지 아냐.석현이 삼촌이야."/"너 혼자 사랑한 거 아니었어.…나도 너만큼 - 너보다도 훨씬 더 너 좋아하고 사랑했었어.…장난 아니었어 그날 밤.내가 어떻게 너를 놓고 장난을 해? 십 오년이 넘는 세월을 단 한 순간도 놓아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이 드라마가 깊은 슬픔이 느껴지면서도 한 없이 따뜻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시청자들에게 ' 세상이 노랫말처럼 아름답다고 믿나요?'라고 물음을 던짐과 동시에 영신의 '기적이 있다고 믿어요.'라는 대답으로 끝을 맺음으로써 답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치듯 지나칠 수 있는 인연들을 하나로 이어 묶어주는, 극 중에서 끊임없이 들리지 않아도 흐르고 있는 잔잔한 자장가 선율처럼 서글픈 희망을 노래하는 드라마.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채 고기잡는 영신이와 철 모르는 봄 있네. 내 사랑아 내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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