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된다.
역시 밀란쿤데라 답게 역사+인간 이야기 인데
농담과는 다르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사랑이야기에 중점이 커
그래서 왜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드보통 소설의 밀란쿤데라 버전임
내가 느끼기엔 그래 네 명의 남녀가 나오는데 이들이 각각 사랑에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사랑에 빠지며 어떻게 사랑을 진행하고
어떻게 종결되는지 그런거를 말해줘
네 명의 남녀는 토마스,테레사,사비나,프란츠
토마스는 자유를 꿈꾸는 의사야, 토마스는 삶의 무게를 거부하고자 하는 인간
테레사는 운명적인 사랑을 믿고 그것을 숭배해 그러면서 신분을 상승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
사비나는 자신의 조국(체코)가 주는 무거움으로부터 가벼움을 갈망해 그래서 사비나는 자신의 흔적이 남길 원하지 않아
사랑도 역시 가볍게 즐기는 스타일
프란츠는 이러한 사비나에게 완전히 매료되는 사람이지
프란츠는 음..약간 정치적으로 참여하는 그런 인간 군상이야.
이렇게 네명이 나와 약간 영화 클로저와 비슷하지?
저렇게 네명의 인물을 파악하고 나면 사실 줄거리는 별거없음
토마스는 의사로 테레사라는 부인을 두고도 여자들을 탐구하기 위해 정부들을 아주 많이 둬 곳곳에
테레사는 그걸 앎에도 자기의 운명적 사랑을 믿기에 그냥 묵인하지만 괴로워해
그러나 토마스와 함께라면 또 의사 사모님이니까 그것도 감수할 만하고
그런데 마지막에는 토마스는 의사를 그만두고 유리창 청소를 하는데 그래도 여전히 불륜질을 하고 다니거든?
근데 테레사는 그래도 그를 사랑해 그런데 괴로워서 결국 시골로 둘이 같이 가지 테레사는 약간 그런 사람이야
사랑에 미친..테레사는 토마스와의 사랑에 대해 괴로우면서도 순종적이야
그리고 사비나는 토마스의 하나의 여친 불륜여친인데 그리고 프란츠는 사비나의 남친
프란츠는 완전시 사비나에 매료된 남자, 사비나는 예술가 이렇게 네명의 구도야
줄거리는 별로 없고 이렇게 딱 네명의 구도만 머리속에 넣어놓으면 생각보다 일기는 어렵지 않은데 좀 시간 관계나 내면 심리 묘사 같은게 많고 복잡해서 그게 좀 힘듦 줄거리는 없고 계속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를 사랑이나 섹스를 통해 나는 그런 소설임
「우리 모두에게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이상 아닐 거라고 믿는다. 토마스는 테레사가 한 말을 떠올리고 그들의 사랑의 역사는 "그래야만 한다"(필연)라기보다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는데"(우연)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토마스는 끊임없이 테레사와의 사랑이 필연인가 우연인가를 계속 되물어 근데 내가 보기에는 토마스도 나중에 가선 이게 필연이었구나 를 깨닫게 되는데 계속 우연인 척 자기 스스로를 합리화 해 계속 처음에는 근데 나중에 가서 생각을 바꾸지..토마스가 회상하는 테레사와의 만남에 대한 구절을 이야기해줄게
「7년 전 테레사가 살고 있던 도시의 병원에 <우연히>치료하기 힘든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 토마스가 일하던 병원의 과장이 급히 호출되었다. 그런데 <우연히>과장은 좌골신경통에 걸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대신 토마스를 시골 마을에 보냈던 것이다. 그 마을에는 다섯 개의 호텔이 있었는데 토마스는 <우연히>테레사가 일하던 호텔에 들었다. <우연히>열차가 떠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그는 술집에 들어가 앉았던 것이다. 테레사가 <우연히>당번이었고 <우연히>토마스의 테이블을 담당했다. 따라서 토마스를 테레사에게 데려가기 위해 여섯 개의 우연이 연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했고 그것이 없덨다면 그는 테레사에게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
그래서 토마스는 테레사를 절대적 우연의 화신이라고 명명해 근데 여섯개의 우연정도면, 필연아니니 이건 내 생각인데 작가가 은연중에 필연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애 토마스는 애써 우연이라고 믿고 싶어하는데 일단 초반은 그래
토마스가 생각하는 우연의 힘이야.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보여졌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앟는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가 그린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토마스가 애써 믿고 있는 이 우연도 토마스는 굉장히 의미있게 보고 있어 솔직히 다 읽고 나면 필연과 우연의 경계가 너무 모호해
이 작가도 굉장히 우연을 찬양한다고 해야하나 우연의 겹침 우연이 계시해주는 그런것들을 굉장히 아름답고 의미있게 묘사하고 있는 구절이 많아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시킨다. 그리고 작곡가나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 테마, 사랑의 탄생과 결부되어 잊을 수 없게 된 이 테마가 그 음울한 아름다움의 힘으로 절망의 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인것같애
존재는 참 가벼운데 우연에 흩날리는, 근데 우린 그것을 참을 수 없어하지
사비나와 프란츠의 이야기야
프란츠는 사비나가 워낙 자유분방한 여자고 가볍게 사랑을 즐기는 여자니까 자신이 상징하는 정조에 그녀가 매료될 것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사비나를 유혹하는 것은 정조가 아니라 배신이었다. 정조란 단어는 일요일에 숲 너머로 지는 태양이나 화병속의 장미 다발을 취미삼아 그리던, 청교도적이며 시골 냄새를 풍기는 그녀의 아버지를 떠오르게 했다. 배신. 어린시절부터 아빠와 선생님들은 배신이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것이라고 누차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배신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배신 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사비나에게 미지로 떠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사비나라는 여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라고 생각해, 그녀가 추구하는 존재 그래서 사비나는 연애를 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배신하고 싶은 욕구가 생김 그래서 배신하고 배신하고 도망치고 떠나고 아버지 이야기했잖아 사비나의 아버지가 청교도적이고 그 아버지는 사비나에게 늘 정조를 강조하고 열 네살짜리 사비나가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기니까 질색팔색하면서 피카소 그림을 보여주며 이걸 사랑이라고 하는 그런 아버지였어 그래서 사비나가 예술을 하게 된거야 아버지 영향때문에 근데 사비나는 사실 피카소를 안좋아하고 화병의 장미를 그리는 일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던 거지 그래서 배신하고픈 욕구가 그녀의 존재 내내 생긴거야 아버지에 대한 반발과 회한, 그런데 사비나의 삶은 결국 배신으로 점철되어 배신의 배신 꼬리를 물게 돼
「그러나 B를 위해 A를 배신했는데 다시 B를 배신한다고 해서 A와 화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혼한 여자 예술가의 삶은 배신당한 그녀 부모의 삶과는 닮지 않았다. 첫번째 배신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첫번째 배신은 그 연쇄작용으로 인해 또 다른 배신들을 야기하며, 그 하나 하나의 배신은 최초의 배신으로부터 우리를 점점 더 먼 곳으로 이끌게 마련이다. 」
결국 사비나가 애초에 배신하고자했던 그녀의 부모에 대한 배신은 잇따른 배신들의 영향으로 점점 더 먼곳으로 우리는 그 첫번째 배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거야 이 구절 공감되더라고 애초에 내가 왜 배신을 시작했나 그 첫번째 배신의 의미가 빛이 바래는거지
프란츠랑 사비나는 진짜 정반대의 남녀임
성향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반대야 그래서 프란츠는 사비나에게 이끌렸던 거고 사비나는 그런 프란츠를 역시 배신할거야
둘이 대표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둘의 존재의 방향이 어떻게 다른지를 빛과 어둠에 대한 둘의 생각으로 알 수 있어
「사비나에게 산다는 것은 보는 것을 의미한다. 시야는 두 개의 경계선에 의해 제한된다. 눈을 멀게 할 정도로 강렬한 빛과 완전한 어둠. 아마도 모든 극단주의에 대한 그녀의 혐오감은 이런데서 연유할 것이다. 극단적인 것은 그것을 넘어서면 생명이 끝나는 경계선의 표시이며, 정치와 마찬가지로 예술에 있어서 극단주의에 대한 열정은 죽음에 대한 위장된 욕망이다. 」
즉 사비나는 극단적인 강렬한 빛, 완전한 어둠 모두를 혐오해 그 가운데 우리가 볼 수 있는 시야 거기에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사비나는 모든 극단주의를 혐오하는 여자인거지
「프란츠에게 빛이란 단어는 부드러운 햇살이 감싸는 풍경의 이미지가 아니라 빛 그 자체 태양 전구 영사기 같은 빛의 완전을 떠오르게 한다. 진리의 태양, 이성의 눈부신 광채 등. 그는 빛과 마찬가지로 어둠에 대해서도 매력을 느낀다. 」
그래서 프란츠는 사비나와 정사를 나눌 때도 불을 끄고 하고 절정의 순간에는 눈을 감아 이 어둠은 순수하고 총체적이기 때문에 환영도 없고 경계선도 없고 오둠은 우리들 각자가 내면에 품고있는 무한성이라고 생각해 절정의 순간에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가는거지 반면에 사비나는 그런 프란츠가 눈을 감는 그 추한 외양때문에 그게 보기 싫어서 눈을 감는 여성이야 확연히 대비되지
사비나는 극단주의를 혐오하는 회의주이자 같은 사람 그래서 체코인모임 이런데 가서도 그 체코인들이 추억하는 체코영웅에 대해서도 결국 잿더미의 영광뿐이라고 체코인의 영혼의 정수는 그저 재뿐이라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고 결국 거기 모여있는 체코인들의 공통점이라곤 패배했다는거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가하는 비난뿐이라는걸 이야기함 어떤..잊혀져 가는 체코의 문화 보헤미아의 문화 그 영혼 정신을 길이기 위해 만든 게 체코인 모임인데 체코의 정체성이라고 떠들어대는 영우의 끝은 결국 이단자로 몰려서 화형당한거거든 그런점에서 오는 회의감 그래서 체코인의 영혼의 정수는 결국 잿더미에 불과한 거라고 그러니까 그 모임에서 서로 패배감에 싸여 서로 비난만 하기 바쁘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임 반면에 프란츠는 적극적으로 정치 행렬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그런 것을 꿈꾸는 인간 군상임
「프란츠는 책 속에 파묻힌 그의 삶을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현실적인 삶 다른 남자들 혹은 여자들과 나란히 걸으며 느끼는 접촉 그들의 환호소리를 희구했다.」
사비나는 이런 프란츠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야하나, 공감하지 못한다고 해야하나 그러고
둘이 같이 뉴욕에 가는데 뉴욕의 아름다움이 지닌 낯섦이 사비나를 광적으로 매료시킨 반면 그 낯섦은 프란츠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동시에 그를 두려움에 떨게 하기도 했어. 그래서 뉴욕의 낯섦은 프란츠에게 유럽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게 됨
프란츠가 사비나를 사랑한 이유 프란츠는 모든 혁명에 동경심을 갖는 인물인데,
「한 때 그는 쿠바에 대해 공감했고 다시 중국에 공감했으나 그들 체제의 잔인성에 역겨움을 느껴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아무런 무게도 없고 인생도 아닌 언어의 바다뿐이라고 쓸쓸하게 인정하고 말았다. 그는 제네바에서 교수가 되었고 일종의 체념속에서 약간의 반향도 있었던 학술 서적 몇권을 발간했다. 그러던 어느날 마치 성모발현처럼 사비나가 솟아났다. 혁명의 환상은 오래전에 시들었으나 그가 혁명에 있어서 가장 찬탄했던 것이 잔존하는 나라에서 그녀가 왔던 것이다. 삶이 위험 용기 죽음의 위험과 같은 웅장한 규모로 판가름이 나는 곳. 사비나는 그에게 인간 운명의 위대성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었다. 그녀의 모습에서 그녀 나라의 고통스러운 드라마가 투명하게 드러났기에 그녀는 한결 아름다웠다.」
즉 사비나는 자기 나라의 혁명같은 거 혁명 이상같은거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인데 오히려 그 모습에서 프란츠는 자기가 평생 동경했던 혁명의 냄새를 진득하게 느낀거야 프란츠는 진정으로 사비나를 사랑해. 근데 사비나는 프란츠를 사랑하긴 하나 옛 남자인 토마스를 잊지 못한다고 해야하나.. 토마스는 약간 마초적인 남자거든 사비나는 토마스가 자기랑 추구하는 사랑의 이상향이 더 맞다고 생각해 그러나 토마스를 더 사랑한건 아닌거 같애 그냥 추구하는 사랑의 이상향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뿐
「프란츠는 강하다. 그러나 그의 힘은 오직 외부로만 향하고 있다. 그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는 약하다. 프란츠의 허약성은 선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프란츠는 사비나에게 결코 명령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예전의 토마스처럼 바닥에 거울을 놓고 나체로 걸어다니라고 명령하진 않을 것이다. 그에게 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명령할 힘이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폭력을 통해서만이 이룰수 있는 것이 있다. 육체적 사랑이란 폭력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녀에게 명령을 내렸을 어떤 남자가 있다면? 누가 그녀를 지배하려 들었을까? 얼마동안이나 그녀는 그것을 참아낼 수 있었을까?
채 5분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어떤 남자도 그녀에게는 적당치 않다. 강한 남자나 허약한 남자 모두.
그녀가 말했다. "당신 힘을 가끔 내게 쓰지 않는 이유가 뭐죠?"
"사랑한다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라고 프란츠가 부드럽게 말했다. 사비나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1. 이 말은 아름답고 진실하다.
2. 이 말로 인해 프란츠는 그녀의 에로틱한 삶에서 자격상실을 당한 것이다.」
근데 어쨌든 프란츠는 사비나를 사랑함으로써 자기를 단단히 구속하고 있는 어떤..틀?
그런것을 깨고 나와서 성장한다고 해야하나..그렇게 됨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메타포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의 어깨에 짐이 부과되었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 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그녀 앞에 놓인 수많은 배반의 순간들이 그녀를 들끄게 하긴 했지만 그 여행이 끝난 그 뒤를 생각해보니 그게 또 우울한거라..
사비나는 프란츠를 떠나고 우울증에 사로잡히는데 그건 프란츠 때문이아니라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한 그녀를 둘러싼 공허때문에 괴로워함. 배신의 끝이 공허일까봐.
그리고 사비나와 프란츠는 그렇게 사비나가 떠남으로써 사비나의 배신으로 관계는 끝나는데 프란츠는 교수잖아 자기 제자랑 사귀거든? 자기 좋다고 하는 여제자랑 사귀어 근데 끊임없이 사비나를 희구함 프란츠에게 있어서 사비나는 아까도 말했듯이 성모발현과 같아서 같이 자고 먹고 하는 건 그 여제자와 하면서 계속해서 사비나를 희구함 끊임없이 마치...어떤 종교적 행위를 하듯이.
이 여자 제자하고 사귀게 된 것도 이 여자 제자는 모든 걸 프란츠에게 맞추는 아이거든? 엄청 프란츠를 따르고 존경하고 사랑해서 그리고 실제로도 프란츠와 통하는게 많고 사비나와 달리 프란츠는 사비나를 떠나보내고 다가온 이 여제자가 사비나가 초지상에서 지상으로 보내준 고귀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여학생을 만나는 거야. 프란츠가 사비나가 다녔던 체코인 모임에 가서 연설하고 막 그러거든 거기서 한 멤버를 보면서
「이 남자는 그와 그의 여신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유지해주는 천사요, 밀사라고 생각했다. 그는 눈을 감고 꿈을 꾸었다. 그는 유럽의 열다섯 호텔과 미국의 한 호텔에서 사비나의 몸 위에서 눈을 감았듯이 눈을 꼭 감았다.」
이게 프란츠와 사비나의 이별이야기임
사비나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때문에 떠난 후 우울해하고 프란츠는 끊임없이 여신화시킨 사비나를 희구하며 살아가고
전혀 다른 속성의 서로를 사랑하면서 자신 존재에 대한 탐구를 했다고 해야 하나 다시 테레사와 토마스로 돌아와서
테레사는 토마스의 바람기 때문에 엄청 괴로웠잖아 그래서 토마스에 대한 복수로 가벼움을 배우고자 맞바람을 펴 근데 괴로워함 피면서도.
어떤 남자랑 자고나서 테레사가 생각한 구절이야
「그녀는 변기 위에 앉았고 갑자기 창자를 비우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치욕의 극단까지 가보자는 욕망 그 저 육체 오로지 육체 자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 어머니가 항상 말했듯 그저 먹고 싸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육체가 되고 싶은 욕망이었다. 테레사는 그녀의 창자를 비웠고 그 순간 무한한 우수와 고독을 느꼈다. 하수관 끝의 터진 입구 위에 벗은 채로 앉아있는 그녀 육체보다 더 비참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
테레사의 영혼은 영원히 토마스의 것이거든?
그런게 그걸 부정했잖아
그 순간 어떤 죄책감과 치욕때문에 모든 걸 부정하고 오롯이 육체가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비참함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있는 거야..
이 처절한 비참함 속에서 나는 테레사가 너무 가여운게 화장실에서 나와갖고
그녀의 육체가 버림받은 알몸으로 입구에 서 있었던 모습 < 이 이미지를 계속 그리면서
「분노한 영혼은 그녀의 내장 속에서 전율하고 있었다. 그 순간 방안에 있던 남자(정사를 나눈)가 그녀의 영혼에 다가섰다면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그의 품안에 안겼을 것이다. 」
그래서 이 정사를 통해 결국 테레사는 토마스에게 어쩔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사랑을 다시 깨달음
「사랑이 탄생하는 순간은 이런 것과 유사하리라는 것을 테레사는 알았다. : 여자는 분노에 찬 영혼을 부르는 목소리에 저항하지 않는다. 남자는 자기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영혼의 여자에게 저항하지 않는다.
토마스는 결코 사랑의 함정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고 테레사는 매 시간 매분마다 그를 위해 몸을 떨 수 밖에 없다. 그녀가 가질 수 있는 무기란 무엇일까? 오직 자신의 정조뿐. 첫 날 부터 마치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이것 밖에 없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버린 듯 그녀가 그에게 바쳤던 정조.
그들의 사랑은 이상하게 비대칭적인 건축물이었다: 그들 사랑은 단 하나의 기둥으로 세워진 거대한 궁전인 양 정조에 대한 테레사의 절대적 확실성 위에 정초된 것이다.」
테레사가 어느 날 길가에서 아이들의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까마귀를 데리고 왔거든?
그래서 정성스럽게 닦아주고 보듬어줬어
그런데 저렇게 토마스와 테레사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나서
「이제 까마귀는 더이상 날개를 흔들지 않는다. 테레사는 죽어가는 언니의 임종을 지키는 것처럼 까마귀의 곁을 떠나기가 싫었다. 하지만 부엌으로 가서 헐레벌떡 끼니를 때워야 했다. 돌아와 보니, 까마귀는 죽어 있었다.」
이 구절이 잇따르거든.
어쩌면 테레사의 일탈=바람과 그에 대한 테레사의 영혼, 사랑에 대한 재인식을 상징하는 구절같애
그러니까 까마귀는 운명의 끝에 있는 고독이고 헐레벌떡 밥을 먹은 건 육체의 부름이지
테레사 가여움..
이런 구절도 있어 그 엔제니어 낯ㅅ헌 남자랑 정사를 나눌 때 나온 구절인데
「그 후 비명은 덜 질렀지만 그녀의 영혼은 여전히 사랑 때문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녀가 엔지니어와 동침을 했을 때, 마침내 사랑의 부재는 그녀의 영혼에 시각을 돌려주었다.」
그래서 정사를 나눈 뒤 그 남자의 모습은 전혀 기억 못해 대신 자기의 육체만 기억함 또렷이 자기의 알몸만
사실 테레사는 테레사 엄마가 되게 천박했거든 집 안에서 알몸으로 돌아다니고
테레사가 공부하고 싶어하면 하지말라고 하고 그래서 테레사는 늘 신분 상승 욕구를 가지고 있었던 거고 역시 운명적 사랑에 자기를 내맡긴 것도 어머니가 그 시발점일지도 몰라 이를 토마스는 적절히 충족시켜준거고
토마스는 자기를 찾아 먼 길을 온 테레사를 보고 기꺼이 받아들이는데 이것을 뭐라고 비유하냐면 성경에 보면 아기를 낳아서 바구니에 담아 물에 띄우잖아 그리고 공주가 발견해서 대신 키우잖아 토마스는 자기가 그 공주라고 생각해 버림 받은 아기는 테레사고. 일종의 책임감에서 발로한 사랑을 느낀 거지
왜냐하면 테레사가 처음 토마스 집에 무턱대고 찾아온 날 둘이 잠을 자고 다음 날 테레사는 엄청나게 아프거든 열나고 몸져 누워 그걸 토마스가 간호해주거든
근데 토마스는 원래 자기 집에서 여자랑 관계한 뒤 절대 여자를 집에서 재우질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던 남자거든
근데 테레사가 그의 영역을 침범한거야 근데 테레사는 늘 토마스의 한 부위를 꼭 잡고 자 손가락이나 팔이나
그런걸 보면서 놀라면서도 그게 불쾌하지가 않은거야 토마스는
그래서 테레사를 버림받은 아기, 자기가 책임지고 건져올려야하는 아기라고 묘사해
토마스는 늘 여자 사냥을 다니잖아 그게 토마스의 어떤..자기 내면을 탐구하는 한 방법이었거든? 여러 여자들과 잠자면서 근데 테레사에 대한 토마스의 태도는 달라
「토마스와 테레사의 사랑은 그와 다른 여자와의 사랑이 끝났던 시점에서 정확하게 시작되었다. 그 사랑은 그로 하여금 여자 사냥에 나서게 했던 명령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테레사의 그 어느 것도 들춰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완전히 드러난 상태에 있던 그녀를 만났던 것이다. 그는 세개의 육체를 열기 위해 사용하는 그의 상상력의 메스를 채 손에 쥐기도 전에 그녀와 정사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정사 중에 어떨거라고 궁금해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이미 그녀를 사랑해 버린 것이다. 사랑의 역사는 그 뒤에 가서나 시작되었다: 그녀의 몸에서 열이 나는 바람에 그는 다른 여자들에게 그랬듯이 그녀를 돌려보낼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리맡에 무릎 꿇고 앉았던 그는, 문득 그녀는 바구니에 넣어져 물에 떠내려와 그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메타포가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이미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네명의 인물 중에 3명은 죽는데 그 사실은 이미 중간에 나와.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건 이 이야기의 결말이 아니라는 거지.
이 이야기의 결말은 결국 시골로 내려가 살게 된 토마스와 테레사가 춤을 추는 장면이야.
결국 토마스에게도 진정한 사랑은 테레사였음을 암시하고, 거대한 운명에 나부끼는 한없이 가벼운 존재들의 이야기.
「토마스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비문 하나: 그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왕국을 원했다.
베토벤에게서는 무엇이 남았을까? 우울한 목소리로 <그래야만 한다>라고 말하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헝클어진 머리에 침울한 표정을 한 남자.
프란츠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비문 하나: 오랜 방황 끝에 귀환.
그리고 그 다음도 또 계속될 것이다. 잊혀지기 전에 우리는 키치로 변할 것이다.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키치란 싸구려 감상으로 공감대를 강요하는 비이성적 집단심리로, 지극히 사소하기만한 인생을, 아울러 인류가 가진 무미건조 리얼리티를 위선적 미적가치로 치장하려는 시도래.
존재에서 망각으로 가기 위한 환승역, 즉 모든 것은 결국 망각,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인생이란 결국 지극히 가볍고 사소한 무언가. 비문 하나 남는 인생.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니체가 바로 그런 니체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테레사는 죽을 병에 걸린 개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쓰다듬는 테레사이다. 나는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본다. 이들 두 사람은 인류,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전진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길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 가볍디 가벼운 존재들이 나누는 '사랑'은 실상 아무것도 주고받지 않는, 자연과 인간의 순수한 사랑보다 하등한 것.
「어렸을 적에 그녀는 월경혈로 얼룩진 어머니의 생리대를 보고는 구역질을 느꼈고 그것을 감추려는 수줍음조차 없었던 어머니를 혐오했다. 그러나 암캐였던 카레닌도 6개월에 한번 보름동안 월경을 했다. - 암캐의 월경은 장난기 섞인 애정을 불러일으켰지만 자기 사진의 월경에 대한 혐오감을 갖는 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해답은 간단하다. 개는 결코 낙원에서 추방된 적이 없다.
카레닌은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혐오감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테레사는 그의 곁에 있으면 기분이 좋고 편안했던 것이다. (그러 ㄴ까닭에 동물을 생기 있는 기계로 바꾸는 것이 그토록 위험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천국과 그들을 연결하는 끈을 인간이 끊는 셈이며 아무것도 시간의 공허를 통해 비상하는 동물을 막거나 위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개와 인간 사이의 사랑보다 열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간 역사의 이러한 기형태는 아마도 조물주가 계획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다 : 테레사는 카레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는다. - 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탐색하고 검토하는 이런 모든 의문은 사랑을 그 싹부터 파괴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떄문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는 다른 무엇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오고 갔다: 테레사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이란 우리는 마지막 역에 있다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는 함께 있다라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네가지 인간 군상을 상징하는 네명의 제각기 다른 네가지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은 가볍게 흩날리는, 끊임없이 사랑을 요구하는 가벼운 존재들, 참을 수 없기에 괴롭지만 그러함에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북크로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