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을 읽었다. 그리 길지 않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장엄하다.
지난 주 북크로싱 때 읽은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에 소개된 단 한 장면때문에 읽고 싶어져서 이 책을 선택했다. 한 장면만으로도 사람을 매료시켰는데 과연, 소설의 문체가 너무 아름답다.
표현들이 그야말로 주옥같다. 읽는 내내 감탄했던 구절들이 너무 많아 세 장면을 뽑기까지 어려웠다. 거기에 더불어, 단순히 문체만 아름다운 소설은 결코 아니었다.
소설 광장의 주인공은 이명준이라는 젊은 지식인이다. 그는 해방 공간에서 남과 북으로 갈라진 그 혼란의 시대를 양 쪽 모두에서 살아본 인물이다. 그 속에서 혁명을 꿈꾸기도 하고, 처절한 사랑을 경험하기도 했으며 전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 분투하는 지식인 청년이 느낀 남북의 한심하고 안타까운 상황, 그리고 그 속에서 개인이 겪는 좌절과 회의, 절망의 끝에서 매달리는 사랑 이 모든 게 소설 속에 녹아있다. 정말 대단한 소설이다.
1. 주인공 이명준이 북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 그에게 좌절의 울분을 토하는 장면
「 아, 이거구나. 혁명가들도 이런 식으로 당하는 모양이지, 그런 다짐조차 어렴풋이 떠오른다. 몸의 길은, 으뜸 잘 보이는 삶의 길이다. 아버지도?
처음, 아버지를 몸으로 느낀다.」
「그는 번듯이 드러눕는다. 푸른 하늘이다. 좋은 철이다. 뭉실한 솜구름이 여기저기 떠돌아가는 하늘은 좋다. 문득 우스개 한마디가 떠오른다.
좋은 철
궁리질 공부꾼은
보람을 위함도 아니면서
코피를 흘렸는데
내 나라 하늘은
곱기가 지랄이다.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분하고 서럽다. 보람을 위함도 아니면서. 아버지 때문에? 어쩐지 아버지를 위해서 얻어맞아도 좋을 것 같다. 몸이 그렇게 말한다. 멀리 있던 아버지가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명준이 북녘에서 만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 그 풍경은 맥빠진 월급쟁이 집안의 저녁 한때일망정, 반일 투사이며 이름있는 코뮤니스트였던 아버지의 터전일 수는 없었다. 부친의 재혼을 마다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처럼, 믿음을 위해서 젊음을 어두운 골목과 낯선 땅 벌판에서 보낸, 어느 여류 코뮤니스트와 맺어졌다면, 그런 의붓 어머니에게 어리광까지도 피웠을 거다. 그러나 이 여자, 그를 도련님 받들 듯하는 이 조선의 딸, 도대체 어디에 혁명이 있단 말인가. ~
혁명을 판다는 죄, 이상과 현실을 바꾸면서 짐짓 살아가는 죄, 그걸 모를 리 없는 아버지가 계면쩍어하는 몸가짐일 것이다. ~
" 이게 무슨 인민의 공화국 입니까? ~ 저는 살고 싶었던 겁니다. 보람 있게 청춘을 불태우고 싶었습니다. 정말 삶다운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남녘에 있을 땐, 아무리 둘러보아도, 제가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광장은 아무데도 없었어요. ~ 인민이라구요?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 그때 프랑스 인민들의 가슴에서 끓던 피, 그 붉은 심장의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 생산 지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 가슴 속에서 불타야 할 자랑스러운 정열, 그것만이 문젭니다.
~ 젊은 사람 치고, 이상주의적인 사회 개량에 정열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그들은, 남조선이라는 이상한, 참으로 이상한 풍토 속에서는 움직일 자리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뿐입니다. 저는 그런 풍토 속에서 성격적인 약점이 점점 커지더군요. 저는 새로운 풍토로 탈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월북했습니다. 어리광을 피려는 저의 손길을, 위대한 인민공화국은 매정스레 뿌리치더군요. ~ 제가 주인공이 아니고 '당'이 주인공이란 걸, '당'만이 흥분하고 도취합니다. 우리는 복창만 하라는 겁니다.
~ 우리는 인제 아무도 위대해질 수 없습니다."
~ 웃음에 지친 그는, 방바닥에 엎드려 소리를 죽여 울었다. 아버지가 미웠다. 아무 말도 않는 아버지가.
그날 밤 늦게, 부친이 소리 없이 문을 열고 자기 방에 들어서는 기척에, 숨을 죽였다. 불을 끈 다음이었다. 부친은 그대로 그의 머리맡에 서 있다가 쭈그려 앉더니, 그의 어깨 언저리 이불깃을 꼭꼭 여며주는 게 아닌가. 명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슬펐다. 아버지가 이런 사랑밖에는 내게 줄 수 없단 말인가.」
「 이제 명준에게 남은 우상은, 부드러운 가슴과 젖은 입술을 가진 인간의 마지막 우상이었다. 오늘 일로 하여 그는 절박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명준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이 잔잔한 느낌만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이 다리를 위해서라면,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모든 소비에트를 팔기라도 하리라. 팔 수만 있다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진리의 벽을 더듬은 듯이 느꼈다. 그는 손을 뻗쳐 다리를 만져보았다.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진리다. 이 매끄러운 닿음새. 따뜻함. 사랑스러운 튕김. 이것을 아니랄 수 있나. 모든 광장이 빈터로 돌아가도 이 벽만은 남는다. 이 벽에 기대어 선 사람은, 새로운 해가 솟는 아침까지 풋잠을 잘 수 있다. 이 살아 있는 두 개의 기둥.」
남녘에 있던 철학과 3학년 이명준은 방종밖에 남아있지 않은 자유주의 남조선에서 무력해서 괴로웠다. 더군다나 자신의 아버지가 북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사회주의자였기에, 경찰에 불려가서 취조당하고 매맞는다.
그러나 아직 북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이명준은, 내심 아버지를 자랑스레 여기며 아버지 대신 맞는 것이라 여기며, 맞으면서도 '아버지를 몸으로 느낀다'. 그리곤, 월북을 결심한다.
그러나 이명준이 북에서 본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그 곳에선 혁명도, 혁명을 품고 있는 뜨거운 가슴도, 정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소련에서 내려온 명령에 의해 '흉내만 내는' 혁명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불어, 내심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투철한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북의 그저 그런, 체제에 적응한 간부에 지나지 않았다. 재혼한 어머니 마저, 사회주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순종적인 조선의 여자였다.
이 모든 것들에 이명준은 절망을 느낀다. 자신이 남녘에서 품고 있더 기대와 꿈이 뭘 더 해보기도 전에 무너진 것이다.
희망에 찬, 정열을 갖고 있던 지식인이 시대적 상황과 장애물 앞에서 철저히 무너지는 장면이 너무 절절하게 다가왔다. 혁명의 이상이라곤 찾아 볼 수없는 북녘과, 아버지와, 자신이 처한 상황. 아버지에게 그런 울분을 토해냈지만 아버지마저도, 모두 다 앎에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아버지마저도 무력한 것이다. 이명준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실망을 한다.
아버지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은 고작 이불깃을 여며주는 정도의, 평범한 부성뿐이다. 그것이 얼마나 슬펐을까. 아버지에게 울부짖었지만 사실 그의 울부짖음은 남조선 북조선 모두에게 향하는 것이었으리라. 이런 복합적인 감정을 너무 잘 묘사한 대목이다.
그래서 이명준은 사상과 혁명에 대한 희망을 거두고, 북에서 사랑에 빠진 발레리나 은혜에 더 집착하고 집중한다.그녀만이 이제 그에게 있어 삶의 이유가 되며 변치 않는 진리이자 잠시 기대 풋잠을 잘 수 있는 안식의 거처가 된다. 이 대목 역시 표현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의 광장은 사라지고 이제 그에게 남은 건, 그녀를 두 팔로 안을 수 있는 그정도의 공간 뿐이었다.
2. 전쟁이 발발하고, 남녘에서 절친했던 친구 태식을 고문하며 절망의 끝에서, 전쟁통 동굴 속에서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
「 "자네가 이처럼 고생할 만한 값이 남조선에 있었던가?
"자네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만한 값이, 북한에 있었던가 묻고 싶어."
"음, 되묻지 말고, 먼저 내 물음을 받아주게."
"값이 있어서만 사람이 행동하는 건 아닐세."
"그럼?"
"값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도 행동할 수 있어."
"자네 같은 애국자를 왜 남조선이 알아주지 못했을까? 나는 여기 잡혀 오는 자들을 정말 미워해. 이렇게 애국자가 수두룩한데 왜 남조선이 요꼴이 됐지?"
"말해도 좋은가?"
"그러래두."
"자네 같은 사람이 넘어갔기 때문이야."」
「 옛날 은인의 외아들을 목숨을 걸고 풀어주는 공산단원. 안 돼. 그러면 나는 끝내 공중에 뜬 몸일 뿐이야. 이런 기관에 온 것도 내가 자원한 일이야. ~ 이런 전쟁을 겪고도 말끔한 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안다는 거야. 내 손을 피로 물들이겠어. 내 심장을 미움으로 가득 채워가지고 돌아가야겠어. ~ 그녀는 지금 모스크바에 있어. 지금 나에겐 아무것도 없어. 무엇인가 잡아야지. ~ 옛날부터 싸움이란 그런 거야.」
「윤애와 그 남편 태식을 놓아준 다음, 이명준은 이 곳, 전세가 기울어져가는 낙동강 싸움터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었다. 잘된 일이었다. 붙들려오는 사람들을 고문하는 데도 지쳐버린 때였다. 처음에는, 사람의 몸을 짓밟는 악한 기쁨이 있었다. ~ 백 사람이 나무 뿌리를 먹는 갚음으로만 한 사람이 파리제 화장수를 쓸 수 있는 슬픈 틀 속에서, 아무 뉘우침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란 걸 떠올리려고 했다. ~ 역사를 따라잡기 위해. ~ 태식을 고문했을 때 느꼈던 그런 싱싱한 죄악의 기쁨은 아주 짧은 동안에 사라져갔다. ~ 그가 내리치는 가죽띠에 몸부림치는 몸은, 인민의 적이니, 증오할 자본주의자니, 민족반역자니, 간첩이니, 그런 버젓한 것이 아니었다. 옷을 걸치고, 말을 하는, 젖먹이 짐승의 하나일 뿐이었다. 」
「 사상과 육친과 애인을 깡그리 잃어버리고, 손에 잡히지 않는 죽음과 서로 멍하니 바라보고 앉아 있던 그의 앞에 또다시 나타난 은혜는 어쨌든 조용했던 그의 마음을 헝클어놓은 데서 얼핏 짜증스러우면서도, 외치고 싶은 기쁨을 주었다.」
「그는 여자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가슴. 배. 다리. 그녀의 몸이 그의 몸과 꼭 붙어서 떨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그녀와 같이 지내던 일을 떠올린다. 처음 모스크바행을 얘기하던 날 저녁의 일. 원산 해수욕장의 하룻밤. 그리고 배신. 사랑스럽고 믿던 여자가 다 한여자였다. 지금 품에 안고 있는 이 몸이었다. 이 몸이 모스크바로 옮아가면 배신이 되고, 낙동강으로 옮아오면 뉘우침이 된다? 오른손으로, 은혜의 군복 앞 단추를 끌렀다. 다음에는, 가죽띠를 끌렀다. 마디가 굵은 버클이 무디게 절그럭거린다. 이 고운 몸에, 이 무슨 흉한 쇠붙이란 말인가. 이 몸을 볼쇼이 테아트르의 대리석 기둥이 받치는 놀이마당에서, 전차가 피를 토하는 이 스산한 마당까지 불러온 자는 누군가. 이 예술가의 가냘픈 몸의 도움까지 받아가면서 해내야 할 사람 잡이에 내몰기 위해서? 안 된다. 너희들이 만일 인민의 이름을 팔면서 우리를 속이려 든다면, 우리도 걸맞는 분풀이를 해줄 테다. 사람을 얕잡아 보지 마라.
너희가 한푼을 속이면, 어김없이 한푼을 속히우리라. 전차와 대포를 지키라고 너희들이 데려다 놓은 자리에서, 우리는 원시의 광장을 찾아가고 있다. 이렇게.」
「 어느 날 굴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한 손에 가위를 든 채였고, 명준은 전초선에서 들어온 적정 보고를 쥐고 있었다. ~ 주머니에 넣지도 않고 한 손에 거머쥔 흰 쇠붙이를, 명준은 부신 듯 바라보았다. 쇠붙이가 되비쳐보내는 여름 햇빛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손에 하나씩, 죄의 증거를 들고 있었다. 은혜의 손에 들린 가위가 이런 시간에 이런 자리에 와 있는 탓으로, 몇 사람의 병사가 혹시 살았을 목숨을 잃었을는지도 모르며, 적어도 끊지 않아도 될 다리를 끊어야 할는지도 몰랐다. ~ 명준이 들고 있는 보고서에는, 우군의 한 사단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어떤 움직임의 낌새가 적혔는지도 몰랐다.」
두번째 장면은 이명준이라는 개인의 역사와 거대한 민족 역사의 흐름이 중첩되는 부분이다. 이명준이라는 개인이, 남과 북 분단의 과정과 그 결과로 일어난 전쟁 속에서 어떤 삶을 살게 되며 어떤 삶의 선택을 하는가, 그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잘 드러내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사랑했던 은혜는 그를 속이고 모스크바로 갔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상도, 아버지도, 사랑도. 그러던 와중에 전쟁이 터지고. 북한이 남한을 점령했을 때, 명준은 자원해서 남한 사람들은 고문한다.
그 와중에 자신과 절친했던 친구 태식을 만난다. 그런 태식에게 이럴만한 가치가 남한에 남아있었느냐고 묻는다. 태식은 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라 답하면서, 월북한 명준을 탓한다.
그러나 명준은 모질게 태식을 고문하고 태식의 아내 윤애도 괴롭히려 한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명준은, 이제 그만 역사에 굴복하고 싶기 때문이다. 역사의 발걸음에 발맞춰 걷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태식과 윤애를 풀어줌으로써 명준은 차마 하지 못한다. 그의 인간적인 고뇌가 느껴지는 장면이다.
그리고 전쟁터로 내몰려진 명준은 거기에서 명준에 대한 죄책감때문에 간호병으로 자원해 온 은혜를 만난다. 자신을 배신했지만 사랑했던, 사랑하는 여자를, 명준은 다시금 품에 안는다. 오로지 그들만이 존재하는 원시의 광장에서 그들은 치열한 사랑을 나눈다. 그들의 행위는, 어쩌면 이상에서 한없이 틀어져버린 현실에 대한 분풀이이자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저항이다.
그리고 그렇게, 피튀기는 전쟁의 속에서 명준은 은혜마저도 영영 잃는다.
3. 휴전 뒤 이명준이 중립국행을 택한 이유와 배 위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
「 제삼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자기를 위해 마련된 길이라고 그는 생각했었다. ~ 이제 그가 북으로 가야 할 아무 까닭도 없었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 그 사회 속의 어떤 사람과 맺어져 있다는 말이라면, 맺어질 아무도 없는 사회의, 어디다 뿌리를 박을 것인가. 더구나 그 사회 자체에 대한 믿음조차 잃어버린 지금에. 믿음 없이 절하는 것이 괴롭듯이, 믿음 없이 정치의 광장에 서는 것도 두렵다. ~ 그렇다면? 남녘을 택할 것인가? 명준의 눈에는, 남한이란 키에르 케고르 선생식으로 말하면, 실존하지 않는 사람들의 광장 아닌 광장이었다. ~ 오늘날 코뮤니즘이 인기 없는 것은, 눈에 보이는, 한마디로 가리킬 수 있는 투쟁의 상대 - 적을 인민에게 가리켜줄 수 없게 된 탓이다. 마르크스가 살던 때에는 그렇게 뚜렷하던 인민의 적이 오늘날에는, 원자 탐지기의 바늘도 갈팡질팡 할만큼 아리송하기만 하다. 가난과 악의 왕초들을 찾기 위하여, 나누어지고 얽히고 설킨 사회 조직의 미궁 속을 헤매다가, 불쌍한 인민은, 그만 팽개쳐버리고, 예대로의 팔자풀이집, 동양 철학관으로 달려가서, 한 해 토정비결을 사고 만다.」
「 나는 영웅이 싫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 좋다. 내 이름도 물리고 싶다. 수억 마리 살마 중의 이름 없는 한 마리면 된다. 다만, 나에게 한 뼘의 광장과 한 마리의 벗을 달라. 그리고 이 한 뼘의 광장에 들어설 땐,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그만한 알은 체를 하고, 허락을 받고 나서 움직이도록 하라. 내 허락도 없이 그 한 마리의 공서자를 끌어가지 말라는 것이었지. 그런데 그 일이 그토록 어려웠구나.」
「 펼쳐진 부채가 있다. 부채의 끝 넓은 테두리 쪽을, 철학과 학생 이명준이 걸어간다. ~ 정치는 경멸하고 있다. 그 경멸이 실은 강한 관심과 아버지 일 때문에 그런 모양으로 나타난 것인 줄은 알고 있다. 다음에, 부채의 안쪽 좀더 넓은 너비에, 바다가 보이는 분기가 있다. 거기서 보면 갈매기가 날고 있다. 윤애에게 말하고 있다. 윤애 날 믿어줘. ~ 유토피아의 꿈을 꾸고 있는 그 자신이 있다. ~ 그의 삶의 터는 부채꼴, 넓은 데서 점점 안으로 오므라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은혜와 둘이 안고 뒹굴던 동굴이 그 부채꼴 위에 있다. ~ 삶의 광장이 좁아지다 못해 끝내 그의 두 발바닥이 차지하는 넓이가 되고 말았다. ~ 다만 한가지가 없었다면, 그는 두 마리 새들을 방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 방금 태어난 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 ~
바다. 그녀들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장을 명준은 처음 알아본다. ~ 제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이 거기 있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포로로 잡힌 이명준은 남이냐 북이냐 혹은 제삼국이냐로 갈지를 정해야 한다. 이명준에게는 더이상 남에도, 북에도 갈 이유가 없다. 그는 아무 연고도 없는 중립국을 택한다.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명준은 자신의 개인사, 과거를 회상한다. 유토피아를 꿈꾸던 철학과 학생이 있고 철모르는 사랑에 빠졌던 첫사랑 윤애가 있고, 북에서 느낀 절망감이 있고 그 절망감 끝에서 붙잡았던 마지막 사랑, 은혜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혜마저 사라진 이명준이라는 삶의 궤적의 마지막엔 두 발바닥만이 차지할 수 있는 공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중립국을 택했던 것이다.
지난 주 북크로싱 때 느꼈던 것 처럼, 위대한 소설은 역사에 인간을 담아낸다. 이 두가지를 아름답게 담아낸 세 부분을 꼽아봤다.
그가 바랬던 것은 그저 한 뼘의 광장과 벗, 그 뿐이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시대적 상황과 환경, 그의 이상 속에서는 이루어내지 못하고 그는 절망만을 맛봤을 뿐이었다.
전쟁에서 전사한 은혜가 품고 있던 자신의 딸, 이명준은 자신의 역사를 휘감는 바다 한 복판에서 그 둘이 환생한 갈매기 두마리를 본다. 그들이 날고 있는 푸른 광장을 본다. 그리고 그들과 하나가 된다.
이 포스팅 제목이 이 소설의 첫 문장이다. 이처럼, 이 소설이 진행되는 전체에서 내내 아주 푸르고 육중한 바다가 가득 채우고 있는것 같다.
이명준 개인의 역사가 그러하며, 그가 살았던 시대의 민족의 역사가 그러하기 때문에, 바다는 그렇게 육중한 몸을 뒤채면서 숨을 쉬었던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명준 개인의 삶에서 느껴지는 처절한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그 뒤에 녹아있는 거대한 민족 역사의 비극을 읽어볼 수 있었다.
더불어 이 소설의 표현들이 모두 너무 토속적으로 아름다웠으나 또 담고 있는 사상은 세련된 것이, 정말 독특하고 멋진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내 인생에서 오래도록 기억 될 것 같다.
[북크로싱] 최인훈,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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