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의 면도날을 읽었다.
몸이 실제로 이야기에 등장하여 극 중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 인물들의 삶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관찰자로서 쓴 이야기다.
그래서 이 책에는 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시간순이 아니라 인물순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1. 엘리엇
「... 남편과 별거 중이거나 이혼한 미국 부인들이 예전에 귀족들이 살던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면서 종종 화려한 파티를 베풀었지만, 엘리엇은 그런 자리에 가서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세련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억양으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정치인들, 식사 예절이 보기 민망할 만큼 형편없는 기자들, 심지어는 배우들도 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족 집안의 자제가 장사꾼의 딸과 결혼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여전히 파리에는 활기가 넘치지만, 그것은 조잡하고 천박한 활기였다! 쾌락만을 미친 듯이 좆는 젊은이들은, 비좁고 탁한 클럽들로 몰려다니면서 한 병에 100프랑씩 하는 샴페인을 마시고 천박한 사람들 틉에 끼어 새벽 5시까지 춤추며 흥청거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런 곳의 연기와 열기, 소음을 접하면 엘리엇은 지끈지끈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곳은 그가 30년 전에 정신적 고향으로 삼았던 그 파리가 아니었다. 훌륭한 미국인이 죽으면 가게 된다는, 그 파리가 결코 아니었다.」
「 세상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속물인 엘리엇이 또한 누구보다도 자상하고 배려 깊으며 마음이 넓은 남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나는 침대로 가서 등대의 불빛에 의지하여 엘리엇의 맥박을 확인했다.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침대 옆의 램프를 켜고 그를 보았다. 턱이 축 쳐져 있었다. 미처 감지 못한 눈을 감겨 주려다가 잠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울컥했다. 뺨을 타고 눈물 몇 방울이 흘러내렸을 것이다. 다정했던 옛 친구. 그의 인생이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고 보잘 것 없었는지를 생각하니 슬픔이 밀려왔다. 수많은 파티에 참석하면서 그 모든 공작, 백작들과 허물없이 지냈지만, 이제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그를 잊었으니까.」
엘리엇은 몸과 절친한 친구이다. 면도날은 엘리엇의 가족들, 몸이 엘리엇을 통해 알게된 인물들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엘리엇은 미국인이지만 먼 조상이 유럽의 귀족이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속물적인 사람이다. 파티를 가장 사랑하고, 사교계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사모으고, 훌륭한 미국인은 죽으면 파리로 간다고 생각할 정도로 파리와 유럽 상류사회를 동경한다. 반면에 하류사회는 경멸한다.
그러나 가족에게는 끔직하다. 자신의 여동생의 딸인 이사벨, 그의 남편인 그레이 그들의 두딸에게 역경이 닥치면 서슴없이 도와준다. 아껴주고, 사랑해준다.
평생을 사교계에 몸담았고 죽기 마지막 순간까지도 유명 파티의 초대장을 가슴에 품고 죽은 그의 이야기는 처음에는 참 부질없고 속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삶이고 부질없지 않은가.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자기의 삶과 자기 사람들을 충실히 사랑했던 사람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비난 할 수 없을 것이다.
2. 이사벨(+그레이)
「 "알았어. 그럼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거나 의학 공부를 하는 건 어때?"
"아니 그건 싫어."
"그럼 뭘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래리, 바보같은 소리 하지마.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라구."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눈물까지 글썽였다.
"울지마. 난 당신이 슬퍼하는 거 싫어."
...." 내가 슬퍼하는 게 싫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당신은 날 슬프게 만들고 있잖아. 래리, 사랑해."
"나도 사랑해, 이사벨" 」
「 ... "하지만 래리, 그거 알아? 당신은 나한테 맞지도 않는 삶을 요구하고 있어. 내가 관심도 없고, 또 관심을 갖고 싶지도 않은 삶 말이야. 난 그저 평범한 여자일뿐이라구.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어? 난 이제 겨우 스무 살이야. 10년 후면 늙어 버릴 거고, 지금 시간이 있을 때 삶을 즐기고 싶어. 아 , 래리, 난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삶은 시시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야. 제발 부탁이니, 당신 자신을 위해서 포기해. 래리, 당신은 남자니까 남자다운 일을 하란 말이야.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시간을 소중하게 쓰고 있다구. 당신이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그런 헛된 꿈 때문에 나를 포기하진 않겠지. 이미 해 보고 싶은 만큼 했잖아. 이제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자."」
「 "왜 그런 식으로 말씀하세요? 선생님은 항상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전 제가 주인공 역할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주인공은 래리니까요. 그는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아름다운 꿈을 꾸는 몽상가죠. 설령 꿈이 실현되지 못한다 해 도 그런 훌륭한 꿈을 꾸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멋진 일일거에요. 반면에 저는 냉정하고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역할을 하고 있죠. 상식이라는 게 그렇게 큰 공감을 얻을 만한 멋진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선생님이 잊고 계신 점이 있어요. 결국 손해 보는 사람은 저라는 사실 말이에요. 래리는 아름다운 꿈의 구름을 좇아 마음껏 하늘을 돌아다니겠지만, 전 그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뒷수습을 하고 빠듯한 살림을 꾸리느라 바동거려야 할 거예요. 저도 사람답게, 즐겁게 살고 싶어요."」
「 " 전 그레이와 결혼해서 매우 행복해요. 정말 좋은 남편이죠. 경제공황이 오기 전까진 우린 정말 행복한 시간만 보냈어요. 좋아하는 사람들도 같고, 또 취미도 비슷하고요. 그레이는 참 자상한 남자에요. 나밖에 모르는 남자가 옆에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죠. 결혼했을 때나 지금이나. 저에 대한 애정에 변함이 없답니다. 그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여자라고 생각해요. 얼마나 자상하고 이해심이 많은지, 선생님은 상상도 못하실 거에요. 어찌나 마음이 넓은지 어떤 때는 바보 같아 보일 정도예요. 나한테는 아무리 잘해줘도 모자라단 생각이 드나봐요. 지금껏 살면서 저한테 거친 말이나 싫은 소리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여자인가 봐요."」
「 ...이사벨은 내 생각을 읽으려는 듯 오랫동안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옆 테이블에서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어 불을 붙인 다음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그녀는 굽이굽이 허공으로 올라가는 연기를 지켜보았다.
"내가 그만 가줄까?" 내가 물었다. "아뇨." 나는 한동안 말 없이 그녀를 지켜보며 오뚝한 코와 아름다운 턱 선을 음미했다.
"아직도 래리를 많이 사랑해?"
"미치도록요. 평생 다른 사람은 사랑해 본 적도 없다구요."
"그런데 왜 그레이와 결혼했지?"
"결혼은 해야 했으니까요. 그레이는 저한테 푹 빠져 있었고, 엄마가 원하시는 일이기도 했어요. 전부들 래리와 헤어진 게 잘한 일이라고 했죠. 저도 그레이가 정말 좋았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그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아세요? 그렇게 자상하고 사려 깊은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예요. 겉으로 보기엔 성격이 보통 아닐 것 같죠? 하지만 저한테는 늘 천사 같아요. 돈이 있을 땐, 늘 갖고 싶은 게 없냐고 물었죠. 내가 갖고 싶을 걸 갖게 해주는 게 자기한텐 너무 즐거운 일이라는 거예요. 한번은 제가 요트를 타고 세상을 돌아보면 재밌겠다고 했었거든요. 주식시장이 무너지지만 않았으면 요트도 사 줬을 거에요."
... " 그 정도면 정말 호사롭게 살았죠. 그 점에 대해서는 언제까지고 그이한테 고마워할 거에요. 덕분에 아주 행복했으니까." 나는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이를 진짜 사랑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사랑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구요. 마음속 깊이 래리를 갈망했지만, 눈앞에 안보이니까 그럭저럭 버틸 수 있더라구요. 전에 선생님이 그러셨죠? 드넓은 바다가 가로놓여 있으면 사랑의 고통도 어느정도는 누그러든다고. 그땐 참 냉소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맞는 얘긴 것 같아요."」
이사벨은 엘리엇의 조카이다. 평생을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는 품위있는 미국의 부유한 집안 아가씨다. 그런 그녀에게는 너무도 사랑하는 약혼자 래리가 있다. 둘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왔고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스무 살이 넘고, 전쟁에서 돌아온 래리는 뭔가 달라져있었다. 이사벨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색에 빠져있을 때도 있고 말도 부쩍 없어진 것이다. 결국 이사벨은 그의 원대로 그를 파리에 2년동안 보낸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이 되어, 파리로 래리를 데리러 간 이사벨은 래리가 지난 세월 동안 파리의 한 후미진 골목에서, 구질구질한 집에서 오로지 책을 읽으며 보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둘은 삶을 대하는 방식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었던 연인이었다. 래리는 삶의 목적이 지적 호기심의 탐구와 몸을 혹독하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인생의 숭고함이었다면 이사벨은 풍요로움 속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간혹 사교계에도 나서는, 그런 삶을 꿈꿨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사벨에게는 '희생'을 감내할 만한 열정은 없었던 것 같다. 서로 너무 다른 방향을 바라봤기에, 이별은 담담했다. 이사벨은 자신을 짝사랑하던 대부호의 아들 그레이와 결혼하여 꿈꾸던 삶을 꾸려나간다.
그러나 래리는 이별 후 세월이 갈수록 이사벨이 손에 잡을 수 없는 초연한 인물이 되어간다. 이사벨을 비롯한 엘리엇, 그레이 등은 그런 래리의 모습을 처음에는 아니꼽게 바라보지만 결국 그 래리의 삶 또한 하나의 삶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걸 인정하고 응원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사벨은 평생 자신의 남자일거라 생각한 래리가 더이상 자신이 곁에 둘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괴로워한다. 나는 엘리엇보다는 덜 속물적이지만 적당히 현실적이고 계산적이며 돈이 주는 행복감을 아는 이사벨을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래리와 같은 이상주의자가 결국 서머싯 몸이 바라보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은연중에 이야기하지만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이사벨도 이사벨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다. 이사벨은 대공황이후 모든 돈을 잃은 그레이와 자신의 사정에도 쉽게 절망하지 않고 현실을 받아들이며 또 그안에서 삶을 개척해나가는,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다.
평생 가슴이 저미도록 사랑한 남자는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간다해도, 이 현실적인 여자는 자신의 주변에서 행복을 추구해나가며,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들을 보듬을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다. 그래서 면도날 속에서도 실상 서머싯 몸이 주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인물은 래리로 보이나,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서머싯 몸과 가장 깊은 교류를 하는 인물은 이사벨인 것 같다.
3. 래리 (+소피, 수잔)
「 "말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어. 표현하려고 하면 혼란스럽기만 하고. 어떤 땐 이런 생각이 들어. '이런 것 저런 것을 고민하는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내가 거만하고 몹쓸 인간이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 나도 남들 가는 길을 가면서, 그럭저럭 세상사에 순응하면서 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말이야. 하지만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쌩쌩한 녀석이 죽은 모습으로 누워 있던 게 떠올라. 그러면 모든 게 얼마나 잔인하고, 얼마나 무의미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산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삶이란 눈 먼 운명의 신이 만들어 내는 비극적인 실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그런데 난 말이지, 그때 이상하게도 그 작은 십자가들 아래 누워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우리보다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거야. 그런 기분을 느꼈다고 친구한테 말했더니 대체 무슨 소리냐고 갸우뚱 거리더군. 하지만 나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어. 친구는 나를 무슨 정신병자 취급했지. 그리고 언젠가 한 번은 전투가 끝난 뒤에 프랑스 병사들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장면을 본적이 있어. 그런데 마치 극단이 망한 후라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져서 먼지 가득한 구석에 쌓여 있는 꼭두각시 인형들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거야. 래리가 너한테 했다는 그 말 있지, 죽은 사람은 정말로 죽은 사람처럼 보인다는..그때 나도 그런 느낌이었어."」
「"...'네 뒤에 붙어 있던 놈을 내가 해치웠지.'
'팻시, 얼마나 다친거야?' 놀란 제가 물었어요. '아무것도 아냐, 녀석이 나를 격추시켰지 뭐야.' 팻시의 얼굴은 굉장히 창백해져 있었어요. 갑자기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더군요. 스스로 죽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모양이에요. 자기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해봤을 텐데...그때 갑자기 옆에 있던 사람들이 말리기도 전에, 그는 몸을 일으켜 앉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어요.
'설마, 내가...'
그리고 쓰러져 죽었어요. 겨우 스물둘이었는데, 전쟁이 끝나면 아일랜드에 있는 아가씨와 결혼할 거라고 그랬는데..."」
「"...그런 식의 얘기를 처음 했을 때 그가 한 말을 저는 잊을 수가 없었어요. 온몸에 전율이 흘렀거든요. 그는 무에서 무가 나올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고, 이 세상은 영원성의 현시라고 말했어요. 게다가 이런 말도 했어요. 선뿐만아니라 악 역시 신의 직접적인 현현이라고. 자동피아노의 댄스곡이 흐르고 있는 지저분하고 시끌벅적한 술집에 앉아서 그런 얘기를 듣는다는 건, 참 묘한 기분이었어요."」
「 그러는 동안 래리 역시 거리낌 없이 웃으면서 재잘거리는 이사벨의 이야기를 즐겁게 들었지만, 나는 그에게서 어떤 초연한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부러 그렇게 보이려고 행동을 꾸미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감수성이나 어떤 힘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의 내면에는 분명히 초연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 나는 궁금한게 아직 남아 있었다. "자네와 함께 살았다는 그 수행자는 어떤 사람이었나?"
"외모 말인가요? 키가 큰 편은 아니었습니다...언제나 허리에 간단한 천만 하나 두르고 다녔는데 그래도 브룩스 브라더스 광고에 나오는 젊은이 못지않게 깔끔하고 깨끗했어요."
"그 사람에게 특히 매료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나?"
래리는 대답하기 전에 한참 동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움푹 들어간 그의 눈은 마치 내 영혼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볼 것처럼 날카로웠다.
"성스러움이요."
...." 자네는 거기에서 무엇을 얻었나?"
"평화요." 그는 가볍게 미소를 띠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 수잔은 맥주를 쭉 들이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묘한 사람이에요. 난 그사람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가끔 책을 읽어주기도 했죠. 낮에는 아이 옷을 만들고 있을 때, 밤에는 아이를 재운 후에 말예요." ..." 내가 감동적인 부분에서 울음을 터뜨리면 래리는 나를 이상하게 보곤 했어요. 물론, 그건 단지 아직 회복이 덜 돼서 그런 거죠. 그때 읽었던 책들, 아직도 갖고 있답니다. 지금도 그가 읽어 줬던 세비녜 부인의 <서간집>을 읽으면 그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고요하게 흐르던 강물과 저편 강둑에 서 있는 포플러 나무들까지 눈에 선해서 더이상 읽을 수가 없어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몇주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어요. 래리 그 사람은 정말 다정한 천사였죠." ...
"그 사람, 사랑을 나누는 방식이 정말 묘하더라고요. 아주 달콤하고 부드럽고, 심지어 다정했어요. 하지만 뭐랄까, 정력적이지만 진정한 열정은 없었쬬.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렇다고 나쁜 버릇이 있는 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피끓는 사춘기 소년 같았다고요. 나름대로 재미있고 감동적인 경험이었죠. 그의 방을 나서는데, 그가 아니라 내가 고마워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문을 닫을 때 보니까, 글쎄 다시 책을 집어 들고 계속 읽지 뭐예요."
... "곧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가 불러 줄 때까지 기다리면 영영 기다려야 할 거라는.. 그래서 하고 싶을 때마다 그냥 그사람 방에 가서 침대에 누웠어요. 그는 늘 아주 다정하게 맞아 줬죠. 그러니까 자연적인 본능은 어느 정도 있었던 거예요. 말하자면, 다른 데 몰두해서 밥 먹는 것도 잊고 있다가 상을 잘 차려 놓으면 맛있게 먹는, 그런 남자였던 거죠...."」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도 그레이와 같은 생각이야. 그 아가씨가 정말 안됐다는 생각."
"아가씨가 아니에요. 벌써 서른이라구요."
"남편과 아기가 죽었을 때 소피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껴졌을 거야. 그래서 자신이 어떻게 될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술과 난잡한 성교라는 끔찍한 타락으로 스스로를 내몬 거지. 자신을 그렇게 잔인하게 대한 삶에 복수하기 위해서 말이야. 천국 같은 생활을 하다가 그것을 잃게 되니까 보통 사람들이 사는 보통 세상을 견디지 못하고 좌절해서 지옥으로 곤두박질친거야. 더이상 신들이 마시는 넥타를 마실 수 없다면 차라리 밀주를 마셔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는 얘기지."
"그런 건 선생님 소설에나 나올 만한 얘기잖아요. 말도 안된다는거 선생님도 아시죠? 소피가 술독에 빠진 건 술을 좋아해서 그런 거예요. ...선에서 갑자기 악이 툭 튀어나올 수는 없죠. 악은 예전부터 항상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걸 잘 막아 두고 있다가 차 사고로 그 방어막이 깨지면서 본래의 모습이 나온 것 뿐이에요. 쓸데없이 소피를 동정하지 마세요. 소피는 원래 그런애였어요."
그때까지 래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저는 열 네살의 소피를 기억하고 있어요. 긴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겨 검은 리본으로 묶었는데 주근깨가 난 얼굴은 늘 진지했죠. 겸손하면서도 새침하고 이상주의자 같은 아이였어요. 손에 잡히는 건 뭐든 읽는 아이라 저랑 책 얘기를 주고 받곤 했죠...소피는 시를 무척 좋아해서 직접 쓴 것도 꽤 많았어...나이에 비해 꽤 멋진 시를 썼던 것 같아. 소피는 귀가 예민하고 리듬감이 남다른 아이였어. 시골의 소리와 냄새, 예를 들면 처음 봄이 찾아올 때 대기에 감도는 온화함, 비온 후에 바짝 마른 흙냄새 따위에 민감했지...전쟁이 끝나고 돌아와 보니까 어른이 다 됐더군...빈곤층의 참상과 노동력 착취에 대해 혹평하는 자유시를 쓰고 있었어. 사실 진부하긴 했지만 솔직한 시들이었어. 연민과 대의도 느껴졌고. 당시 소피는 사회사업가가 되고 싶어 했지. 감동적이었어. 희생하고자 하는 열망 말이야. 난 소피가 아주 유능한 여자라고 생각해. 어리석지도, 감상적이지도 않았지. 그보다는 귀여운 순수함과 기묘하리만치 고매한 영혼을 가진 여자였어. 그해에 우린 꽤 자주 만났지."」
「"...넌 래리가 그 오랜 시간 동안 무얼 찾아녔는지 몰라. 나 역시 추측만 할 수 잇을 뿐 확실하게 알진 못하지. 그는 수년동안 육체노동을 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지만, 그것들도 지금 그가 느끼는 욕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사실 그건 단순히 욕망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한 정도지. 그보다는 마치 아우성치는 듯한 절박한 욕구야. 순수한 아이로만 알고 있던 여자가 타락한 것을 보고 그 여자의 영혼을 구하고픈 욕구에 사로잡힌 거야. 이사벨 말이 옳아. 나 역시 래리가 지금 가망도 없는 일을 하려 드는 거라고 생각해. 래리는 섬세하고 예민한 친구야. 그러니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맛보겠지. 그가 계획한 평생의 과업들,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들 역시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테지. 비열한 파리스는 아킬레우스의 발뒤꿈치를 쏴서 죽였어. 래리에겐 그런 냉혹함이 없지. 성자라고 해도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하는 그런 냉혹함 말이야."」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종류의 일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어요. 너무 하찮게 느껴졌거든요. 그땐 생각할 시간이 많았어요. 끊임없이 자문했죠. 삶의 목적이 무엇일까? 어차피 내가 살아 돌아온 건 단지 운이 좋아서였잖아요. 그래서 제 삶을 십분 활용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죠. 그 전까지는 저는 신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때부터 신을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왜 이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죠. 제가 아주 무지하다는 건 알았지만,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지 몰랐어요. 배움을 얻기 위해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죠.
... 수사들이 그랬죠. 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지만 그건 그리 가치 있는 목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죠. 베토벤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교향곡을 만들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마음속에 존재하던 음악들을 어떻게든 표현해야 했고, 그래서 자신이 아는 방법을 총동원해서 최대한 완벽하게 만든 것뿐이죠.
... 아이들은 아버지가 당연히 먹여 줄 거라고 믿잖아요. 아버지가 음식을 준다고 해서 고마워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죠. 오히려 낳아 놓고 제대로 못 먹이거나 안 먹이면 우린 그런 사람을 비난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물질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할 준비가 안 됐다면 그들을 창조하지 말았어야죠.
... 어차피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한 존재잖아요. 인간을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했다면 그건 하느님이 그것을 의도했기 때문이겠죠.
... 선량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대체 악은 왜 창조한 겁니까? ... 저는 아무리 현명하다 해도 상식이 없는 하느님은 믿을 수 없었어요. 그보다는 이 세상을 창조하진 않았지만 악행을 발견하고 최선을 다해 바로잡는, 인간보다 훨씬 더 선량하고 현명하고 위대한 신을 믿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죠. 자신이 창조하지도 않은 악을 없애려고 안간힘을 쓰는 신, 그리하여 결국 악을 완전히 정복해 줄 수도 있는 신이라면 믿지 말아야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윤회가 세상의 악에 대한 설명이 되는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우리가 겪는 나쁜 일들이 전생에 지은 업보라면 그저 단념하고 견뎌 내려고 노력하지 않을까요? 그 과정에서 선을 추구하며 다음 생에서는 고통이 줄어들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고요. ... 종종 너무나도 부당하게 보이는 일들은 더 받아들이기가 힘들죠. 그런데 그것이 과거의 업보로 인한 불가피한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애석한 마음도 들고 고통을 분담하려고 노력하기도 하겠죠. 그게 마땅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그에 대해 분개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요?"」
「"... 저는 오래전부터 종교를 구원의 필수 조건인것처럼 떠벌리던 종교 창시자들에 대해 서글픈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마치 사람들의 믿음을 얻어야만 자신도 스스로 믿을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 신이라는 것도 기쁨이나 고통처럼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고 가르치죠. 현재 인도에는 신을 경험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아요. ... 사실, 저는 인식을 통해 실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이후 인도의 현인들도 인간의 결점을 깨닫고 사랑을 통해 혹은 의로운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도 있다고 시인하긴 했지만. 가장 어렵고도 고귀한 구원의 수단은 단연 인식이라는 점은 결코 부인하지 않았죠. 인식이라는 수단은 인간의 가장 귀한 능력, 즉 이성이니까요."」
「"... 제가 주장할 수 있는 건, 절대자가 이 세상에 그 자신을 현현했을 때 선과 악이 본질적인 상관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거에요. 지각변동이라는 상상하기 힘든 공포가 없었다면 히말라야 산맥의 장관은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겁니다. 중국의 장인들은 얇은 도자기로 예쁜 모양의 꽃병을 만들어 거기에 아름다운 디자인을 넣고 멋지게 색칠한 다음, 완벽한 광택을 추가하죠.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꽃병도 그 본질적인 속성때문에 쉽게 깨질 수 밖에 없어요. 바닥에 떨어뜨리면 산산조각이 나고 말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도 오직 악과 결합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 ... 다행히 그에게는 시간이 충분하다. 그에게선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어느 면으로 보나 여전히 청년이니까 말이다. ... 래리는 자신의 바람대로 떠들썩하고 소란스러운 인간 집단에 흡수되었다.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괴로워하고 세상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며, 선을 강렬히 소망하면서도 외부에 대해서는 독단적이고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매우 소심한 인간들, 친절하지만 까다롭고, 남을 잘 믿으면서도 의심이 강하며, 야비하면서도 너그러운 ... 」
사실상 면도날의 주인공은 래리다. 서머싯 몸은 이사벨의 약혼자로서 처음 래리를 알았지만 래리가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와 그가 하는 생각들에 매료된다. 전쟁에 참전하던 중 래리는 바로 눈 앞에서 친구의 죽음을 목도한다. 그런 그에게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래리는 왜 세상에 악은 존재하고 나는 왜 존재하며, 신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혀 평범함을 거부한 채,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며 그 답을 찾으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래리는 사랑하는 약혼녀 이사벨도 포기하고 자신의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놔버린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지적 행복감을 추구하며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마치 수도자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서머싯 몸은 그런 래리의 평범하지 않은 삶을, 래리가 워낙 신출귀몰 하다보니 주로 이사벨과 엘리엇, 수잔과 소피를 통해 서술한다.
사실 래리는 극단적인 이상주의자다. 그가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도 어쩌면 그가 갖고 있었던 재산 덕분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물론 나중에는 재산마저도 버린다) 저런 삶을 선택한다는 게 너무도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평범한 그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떠도는 삶.
그러나 끝끝내 그는 자신이 원하는 삶의 궤도를 완성해 나간다. 그래서 나름의 답을 찾고 결코 늙지 않은 정신을 소유한 채 다시 홀연히, 평범한 미국인의 삶으로 돌아간다.
사실 그가 고민하는 것들은 우리가 한번쯤 살아보면서 고민해보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을 래리는, 진지하고 깊게 사색하고 끝내는 자기 나름의 답을 찾아낸다. 책 속에서 래리와 서머싯 몸이 하는 대화에서 여러가지 래리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고 그것이 너무 흥미로웠다. 몇몇 래리의 생각은, 특히 윤회에 대한 생각은 나는 크게 동의하진 않지만 이런 인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특히 래리가 내린 결론, 어떤 문화권의 어떤 신도 그를 충족시킬 순 없었지만, '인식'이 실재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줬다는 부분 거기에서 만족을 느꼈다는 것. 또한 선과 악이 신의 현현으로써 불가피한 상관관계를 가진다는 부분은 정말 독특하지만 멋진 생각인 것 같다.
래리의 이상주의에 대해, 자신의 몽상을 위해 평범한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이사벨마저 져버린 것에 대해 안타까움은 있지만 나는 래리가 좋다. 래리는, 어찌보면 절망의 삶을 허우적 거리는 수잔과 소피를 구원하고자 노력하는,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녀들의 삶이 결코 천박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 따뜻한 가슴을 지닌 현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끊임없이 겸손하게 배우고자 노력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서머싯 몸은 이 이야기들 속에서 수많은 인물들을 만나지만 결코 섣부른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누구의 삶이 더 우월하고 누구의 삶은 천박하다고 단정짓지 않는다. 이 버무려진 세상 속에서 인물들은, 우리들은, 각자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삶을 대한다. 그러나 그런 상충하기도, 융합하기도 하는 삶을 대하는 방식들이, 또 그 삶 자체가 면도날 처럼 날카롭기 때문에 그 속에서 이들은 번민하고, 갈등하고, 그러나 또한 아름답고 충실하게 살아간다. 책의 결말이 가장 마음에 든다. 우리 모두는, 우리 삶의 주인공이다.
서머싯 몸, 면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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