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야, 네가 내 곁에 엎드려 있다면 네게 묻고 싶어. 나는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사랑하지 않는 남자가 준 난을 받는다. 그럼 머뭇거리겠지.
그리곤 받을거다. 문 밖에 놓여질 난이 안쓰러워서.
집에 들여 놓고는 물을 주고 잎을 닦고 할거다. 사랑하는 그를 생각하면서.
사무치는 그리움에 가슴이 적셔질때면 펜을 들어 종이에 써내려 갈 것이다.
고집스럽고 괴짜스러운 음악가들의 삶을 써내려가면 적셔진 가슴이 부푼 클래식들로 드리워질까하여.
묶은 머리 사이로 흘러내려온 잔머리들처럼 정신없이 써내려가면 잊혀질 듯 하여.
그러나 이내 무료하고 따분한 몸짓으로 집 안을 서성거릴거다.언제 그랬냐는 듯.
봄의 꽃이 피어도,여름의 지저귐이 들려도, 그녀의 깊은 눈은 겨울일거다.
깊고 검은 눈으로 이따금씩 창 밖을 내다 볼 땐, 사뭇 계절의 변화가 느껴지는 시점일거다.
살고 있는 아파트 경비아저씨가 바뀌어도, 동료의 헤어스타일이 바뀌어도, 흔들림 없던 검은 눈은 계절이 바뀔 때쯤 하면 한번씩 흔들리곤 하니까.
함께였을 땐 해가 반짝 떠있는 날을 좋아했다.그러나 혼자 살게 되면서부터 비오는 날을 좋아했을거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그 감성을 빌미로 그것에 취한 척,그에게 전화를 걸어도 이상하지 않을테니까.
날씨가 궂으면 그는 사무실에 앉아있겠지.그럼 그녀의 전화를 받을 수 있을거다. 그럼 나긋한 그의 여보세요로 전화가 끊어지는 무심한 소리를 위로할테지.
빗소리와 함께 찾아온 용기가 기다림 뒤에 있던 그리움을 불러올거다.
장을 보다 어리광을 피우고 있는 아이를 보면 지긋이 쳐다보다 문득,어머니가 생각날거다.
나는 왜 그때 어머니를 밀쳐냈을까 하는 의문이 들다가도 이수의 누나 하는 목소리가 들리면 고개를 저을거다.
어머니에게서 오는 그리움은 그녀에게 한 때 괴로움이었으나, 이제는 마음 한 구석의 향수다.
아리고 아려서 차마 꺼낼 수 없는, 소중하지만 보고 싶지 않은 -
그리고 그녀는 가끔씩 소식을 전하는 이수의 전화로 그 아림을 인식한다.
어머니는 그녀의 사랑의 모태다. 감정의 수군거림의 시발점이다.
사랑을 받고,사랑을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 아닙니까 하는 티비속의 외침에 그녀는 옅은 코웃음을 칠거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사랑으로 인해 불행했기에. 사랑이라는 존재가 그녀를 잠식해 삼켜버렸기에.
사랑을 받을 줄만 알았더라면.
그녀는 이수의 자는 콧잔등을 보며 생각했을 거다. 사랑을 할 줄 앎으로부터 모든 불행은 시작되었다하고.
전 생을 사랑하는,사랑했었던 그와 사랑하지 않았던,사랑하는 그와 함께한 것은 불행이었다고.
사랑의 표현에 있어 이기적이라 그녀는 슬프다.
사랑의 시기에 있어 이기적이지 못해 그녀는 슬프다.
베란다 난간에서서 깊고 검은 겨울의 눈으로 움트는 봄을 바라봤을거다.
조용히 가라앉아 생기없이 떠돌던 겨울은 이내 봄내음을 머금고 그녀의 외로운 발끝을 간질였을거다.
그리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슬어지를 생각했을까. 눈이 시리도록 봄같은 나날속 과거의 이슬어지를, 야윈 어머니의 손이 남아있는 현재의 이슬어지를?
그녀에게 만큼은 유독 따뜻했던 그의 품을 생각했을까. 식어버린 그의 눈동자를 생각했을까.
담배 냄새가 진득이 배인 그의 야속한 손가락을 생각했을까.
지난날의 불행을 더듬어 보다,언제고 화연의 눈동자에 비친 차갑게 내려앉은 자신의 외로운 겨울을 생각했을까.
그리고 공허한 입술을 움직여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았을 것이다.
대신 미소를 띠진 않았을까.
「그녀, 그들을 만나 불행했다.
그리고 그 불행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깊은 슬픔, 신경숙 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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