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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슬픔의

생각해보니 내 인생은 과연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

한 남자의 인생을 다룬 소설에서 이토록 공감을 얻을 줄이야.

 

여타의 소년이 주인공인 소설은 가난한 집안에 지지리 궁상인 삶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소년의 범잡할 수 없는 염세주의가 다분했기에, 또한 그래서 공감하고 싶어도 그저 측은함과 타자화를 통한 동정정도에 불과했었기에, 실로 그것들은 소설 전반기 열두살 짜리 소년을 데려다 놓고 짜장면을 먹이며 국제 정세를 논하고 그 결론이 좋은 대학을 가라는 것으로 끝맺는 아버지의 우이독경 같은 이야기들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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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할 2푼 5리의 승률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빈 공간을 가득 메우는 한 문장이 가슴을 친다.

 

담담하지만 꽤 생각이 깊은 딱 중학생 남자 아이의 정신세계를 들여다 보는 것과 같은 서술속에서, 평범한 중학생 시절을 지나왔다면 그 시기가 몇년도 이든 공감할만한 그 나이대의 감정과 생각들이 제법 반가웠다.

 

누구에게나 유년시절의 아련한 추억같은 것은 있기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청소년기에 어떤 한가지에 몸과 정신을 온통 빼앗겨 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소년은 야구였다. 그것도 '프로'야구에서 가장 낮은 승률을 자랑하는 삼미 슈퍼스타즈.

이유는 간단하다. 삼미의 상징인 슈퍼맨은 소년의 작은 우주속에서 지구를 반바퀴나 돌리는 영웅이었기에.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 정도면 삼미가 소년의 인생을 가득 채울만한 가치가 있었다. 

낮은 승률이 가지는 패배감과 높은 승률이 가지는 꿈과 낭만의 공존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웠다.

소년은 야구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소년은 최약체팀 삼미슈퍼스타즈의 연속되는  패배를 통해 인생을 배웠다. 

쓰디 쓴 인생은 더이상 슈퍼맨이 지구를 돌릴 수 있는 작은 우주가 아니었다. 진짜 인생에선 어쩌면, 슈퍼맨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뜨겁게 앓았던 기간에 비해 고요하고, 짧고, 무디고, 별거 아니었던 고별과 왜인지 모르겠는 새삼스러운 소년의 눈물과 함께, 삼미는 은퇴했다.

그리고 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야구에서 벗어난 청년의 인생은 '소속'과의 씨름이었다. 청년은 정말 잘 달리는 프로 경주마가 되었다.

언젠가 끝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어렴풋이 보이는 끝을 향해 열심히 달리는 프로 경주마가 되었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했기에, 승률 최저 야구팀은 청년의 인생 울타리 밖으로 밀려났고 프로가 된 청년의 눈빛은 더이상 타오르지 않았으며, 다소 무심하고 염세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것이 인생이었다.

 

「생각해보니, 내 인생은 과연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 평범하고 평범한 가문의 외동아들이었고, 거의 이대로 평범하고 평범한 가문의 아버지가 될 확률이 높은 인생이었다. 타율로 치면 2할 2푼 7리 정도이고, 뚜렷한 안타를 친 적도, 그렇다고 모두의 기억에 남을 만한 홈런을 친 적도 없다. 발이 빠른 것도 아니다. 도루를 하거나 심판을 폭행해 퇴장을 당할 만큼의 배짱도 없다. 이대로 간다면..맙소사, 이건 흡사 삼미 슈퍼스타즈가 아닌가.

 그날 밤 나는 새로운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 그저 평범하다고 생각해온 내 인생이 알게 모르게 삼미 슈퍼스타즈와 흡사했던 것처럼, 삼미의 야구 역시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야구였단 사실이다. 분명 연습도 할 만큼 했고, 안타도 칠 만큼 쳤다. 가끔 홈런도 치고, 삼진도 잡을 만큼 잡았던 야구였다. 즉 지지리도 못하는 야구라기 보다는, 그저 평범한 야구를 했다는 쪽이 확실히 더 정확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

 

평범한 야구를 했던 삼미 슈퍼스타즈.

 

이 얼마나 적확한 표현이란 말인가. 그러나 거기서 파생하는 또 하나의 의문. 확실히 평범한 야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삼미는 그토록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팀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걸까. 그것은 아마 기록과 순위의 문제 때문이겠지. 라고 나는 생각했으나, 곧 평범한 야구라면 최하위를 기록할 이유가 없다는 쪽으로 다시 생각의 흐름이 바뀌어 갔다. 그렇다. 평범한 야구란 6개의 팀 중에서 3위나 4위를 달리는 팀의 야구를 일컫는 말일테지. 그럼 왜?

 

결론은 프로였다.

 

평범한 야구 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다. 고교야구나 아마야구에 있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팀이 프로야구라는 - 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나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인 세계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 놓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범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삶이 될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큰일이었다. 세상은 이미 프로였고, 프로의 꼴찌는 확실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아아, 실로 무서운 프로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고 16살의 나는 생각했다.

 

이것이 프로의 세계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도 부끄럽긴 마찬가지고, 무진장,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해봐야 할 만큼 한 거고, 지랄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좀 하는데' 라는 소리를 듣고,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의 노력을 해야 '잘하는데'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꽤 이상한 일이긴 해도 원래 프로의 세계는 이런 것이라고 하니까.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이 수선한 마음에 창문을 열어보니 확실히 세상의 공기가 달라진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한 것은 프로야구에 뛰어든 아마추어 야구팀 삼미였고, 나는 이 프로의 세상에서 아마추어를 사랑한 죄로 멸시와 조롱을 받았던 것이다. 분명 누군가가 그해의 프로야구를 창조했고, 프로야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아마추어는 이미 숨을 거두었다.」

 

 

'프로' 로서의 '소속'감을 느끼며 청년은 어른이 되어간다.

삼미의 야구잠바를 벗어던지고 프로 야구팀의 잠바를 입은 '좋은 대학'에 다니는 청년은 그로써 충분했다. 대학은 청년에게 안정된 소속감을 주었고

청년은 그렇게 졸업장만 따면 되는 것이었다.

 

소설의 중반기인 프로가 된 소년, 아니 청년의 이야기는 너무도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마치 열정이 사라진 채 둥둥 바다위를 떠다니는 해조류와 같은 밍숭맹숭함이었다.

간혹 야구를 떠올렸지만 그것은 늘, 너무 멀리 떨어져 버린 듯한 느낌을 동반했다.

우스운 일자바지를 입고 아름다운 그녀와 데이트를 하며 미친 세상에서 미쳐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던 승률 높은 프로인생 소속인 20대의 청년의 삶은

열 두살 인천에서 캐치볼을 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재미가 있을 법했지만 미치도록 지루하게 느껴졌다.

 

어른이 된 청년은 그럴듯한 대학을 나와 그럴듯한 회사에 취직을 하고 그럴듯한 결혼을 하며 그럴듯한 삶을 살아간다.

프로의 세계는 역시나 냉정하기에 프로인 청년은 지랄맞게 열심히 일을한다.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어디로 가기 위함인지도 모른 채.

결국 이혼과 정리해고라는 두 발의 총알탄을 맞고 그는 달리는 프로의 기차에서 떨어지고 만다.

 

매정하게 저만치 빠르게 멀어져가는 기차를 바라보며 '프로'였던 그는 내쳐진 몸뚱아리를 바닥에 붙인 채 숨을 헐떡거린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눈을 감으려던 찰나, 누군가 엎어져있는 그의 어깨를 톡톡 친다.

1982년 인천에서 함께 삼미 야구잠바를 입고 캐치볼을 하던 조성훈은 그를 일으켜 세우고 옷을 털어주었다.

어른이 된 조성훈은 미소를 띤 채 여전히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가방을 들고 있다.

 

아마추어는 죽지 않는다.

 

빠르게 달려가는 기차가 아닌, 발로 걷는 삶은 느리지만, 아름다웠다.

기차의 속도때문에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았다.

하늘과 바람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야구, 야구, 야구, 삼미 슈퍼스타즈.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그것을 깨달은 그의 이야기는 너무 재밌었다. 캐치볼을 하다가 하늘을 한번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행복했고, 행복해 보였다.

아마추어가 된 그의 꿈속에는 불현듯 한 여자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20대 초반 만나 미성숙한 연애를 즐기던 '첫사랑의 그녀'가 아닌, 그저 미안한, 애틋함의 아내이다.

나는 이 부분이 너무 좋았다. 흔한 이야기들처럼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 가 아닌 특별한 그의 이야기라서, 또 그가 진정으로 진짜 인생을 살며, 진정한 어른이 되었고, 성숙한 사랑을 깨달은 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지극히도 평범한 그가 별 볼일이 생겨서 좋다.

아마추어의 삶을 즐기는 그가 행복해서 좋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으며 삼천포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승률 1할 2푼 5리의 인생에는 8할 7푼 5리의 즐거움과 슈퍼맨과 우주와 나의 별, 삼미 슈퍼스타즈가 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