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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슬픔의

그때,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분명히 회상임에도 회상이 아니다. 진희의 유년시절은 언제나 늘 현재진행형이다.

열두 살 진희는 성숙한 아이다. 서른 살 진희는 불완전한 어른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담담하고, 냉소적인. '바라보는 나'로 표현되는 소녀의 감성과 '보여지는 나'로 대변되는 소녀의 이성의 괴리속에서

제 엄마처럼 자아 분열을 일으키지 않을 만큼, 소녀는 영민하다. 세상의 온갖 때를 목격한적이 있단 듯이, 상처받은 염세주의적 소녀는

순진하진 않더라도 너무 순수하다. 순수하기 때문에 비인간적이게 느껴질만큼 냉철하다. 

냉철한 소녀가 문득 문득 무너져내리거나 이성과 감성을 분리해내지 못한 채 어쩔 줄 모를 때,

더이상 성장이 필요 없다고 말하던 소녀는 온데간데 없다. 

그래서 난 진희가 좋다. 안아주고 싶을만큼 인간적이라 좋다.  

진희, 여자, 어린애, 삶,여자,어린애,삶,여자,어린애,삶과 사랑…

 

1.  여자

 

「 아줌마가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바로 자기의 삶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양복점 뒷방에서 강제로 순결을 잃은 순간 이미 자기의 삶은 결정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아저씨가 자기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달라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줌마는 그런 생각을 꿈에도 가져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줌마들은 자기의 삶을 너무 빨리 결론짓는다. 자갈투성이 밭에 들어와서도 발길을 돌려 나갈 줄을 모른다. 바로 옆에 기름진 땅이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한번 발을 들여놨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뼈빠지게 그 밭만을 개간한다.」

 

「 아줌마는 재성이를 포대기로 업고 손에는 기저귀 가방을 들고 서있다. … 이윽고 다리 쪽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버스 한 대가 나타난다. …버스에 가려서 아줌마는 내 눈앞에서 잠깐 사라진다.… 저만치 버스가 멀어진 뒤 비로소 먼지가 가라앉는다. 그런데 그 먼지 속에 아줌마가 여전히 서 있다.… 아줌마는 갈 곳이 있는 게 아니었다. 떠나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 고달픈 삶을 벗어난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확신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떠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기보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무 확신도 없지만 더이상 지금 삶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문에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그런 떠남을 생각하며 아줌마는 사라진 버스 쪽을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는 것이리라.」

 

「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건만 아줌마는 자기 인생에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어진 인생에 충실할 뿐 제 인생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일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모험심이 부족하다. 진정한 자기의 삶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찾아보려 하기보다는 그냥 지금의 삶을 벗어날 수 없는 자기의 삶이라고 믿고 견디는 쪽을 택한다. 특히 여자의 경우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배후에는 '팔자소관'이라는 체념관이 강하게 작용한다.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그 체념은 여자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연히 닥쳐온 불행을 이겨내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만듦으로써 더 많은 불행을 번식시키기 때문이다.

 강제로 처녀를 잃었을 때 아줌마는 자기에게 닥친 우연한 불행을 이겨냈어야 했다. 옷매무새를 수습할 수 있게 되자마자 바로 뺨을 올려붙이거나 아니면 침을 뱉고 돌아서서 깡그리 잊어버려야 했다. 하지만 아줌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 자기 인생이 결정돼버렸다고 체념했으므로 죽자사자 아저씨한테 매달렸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쳤을 때까지도 아줌마는 아저씨가 자기 둘의 돌이킬 수 없는 운명, 즉 자신이 아줌마 육체의 주인이란 것을 깨닫게 하자 아저씨의 테두리 속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많은 여자들의 결혼은 첫경험에 의해 결정된다.… 문제는 그런 첫경험이 우연히 이루어지는 일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은 자기 자신의 것이다.… 처녀성을 가져간 사람이 내 주인이라는 생각, 우연에 지나지 않는 그 사건에 운명적 의미를 두는 것, 그 모두가 내게는 어리석게만 생각된다.」

 

2.  어린애

 

「 나는 봉희처럼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하는 애들을 경원한다. 어른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것처럼 스스로 어린애임을 드러내 보이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어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어린애답게 보이는 것이다. 어린애로 보이는 것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비상시에는 강력한 무기도 된다. 그런데도 아무런 이지적 노력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해도 시간이 해결해주는 그따위 신체적 성장을 남의 눈 앞에 앞당겨서 보이려 한다거나 다만 금기라는 사실때문에 본뜰 가치도 없는 어른 흉내에 매료된다거나 하는 것은 역시 봉희 같은 어린애들만의 생각이다.」

 

「 "왕건은 고려를 세워놓고 지방 호족들이 반발할까봐 그 딸들하고 결혼해서 호족들을 다 장인으로 삼아버렸지… 정권을 잡으면 다들 중앙집권을 굳히고 정통성을 증명하려고 야단이지. 특히 힘으로 뺏은 정권이라면 더욱더."

 … 남자애들이 전쟁놀이를 하며 편을 가를 때처럼 학교에서는 역사적 인물을 가르칠 때 훌륭한 사람과 나쁜 사람, 두 종류로만 가르친다. 그런 교육방식을 가장 잘 받아들이는 것이 장군이 같은 아이이다. 장군이는 중세의 십자군이든 유엔군이든 연합군이든 간에 모든 전쟁에 등장했던 군대의 이름을 '우리 나라'와 '남의 나라'로 구별한다. 좋은 편이다 싶으면 무조건 '우리 나라'이고 나쁜 편이다 하면 '남의 나라'이다.… 따라서 제가 미국 사람도 아니면서 미군을 가리킬 때 언제나 '우리 나라'라고 부르며 미군의 승리를 갖고 꼭 '우리나라가 승리했다'고 한다. 

 그런 장군이에게 언젠가 이선생님은 일제시대 때는 일본이 '우리 나라'이고 미군이 '남의 나라'였으며, 그런 이분법은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해 준 적이 있다. … 학교에서 가르치는 이분법에 따르면 왕건은 의심할 바 없이 훌륭한 사람 쪽이다. … 하지만 언제나 사실 뒤의 이면에 관심이 많은 나는 단지 "역사적 사명"에 의해서 민족과 나라를 구했다고 알려진 인물의 진면목에 대해 이따금 의구심을 품곤 했다. 조회 때마다 소리내서 외우는 국민교육헌장에 따르면 나 자신도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긴 했지만 말이다.」

 

「 신화영의 아버지인 대동병원 원장은 학교에 상당액의 장학지원을 약속 한 바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선생님들에게도 적지않은 '인사'를 했다.… 교직원 회의에서 내린 결정에 의해 신화영은 부회장 임명장을 받았다. 투표에 의해 뽑힌 진짜 부회장은 아이들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부회장 서리'라는 직책을 맡았는데, 대외적으로는 신화영이 부회장이고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부회장의 역할을 하는 것은 부회장 서리라는 설명을 선생님으로부터 들었지만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납득이 안 가는 것은 아이들이나 개교 이래 처음 생긴 그 직책을 맡게 될 부회장 서리나 마찬가지였다.

 몇몇 아이들은 선생님을 욕했지만 어디까지나 뒷전에서 저희들끼리 그래보는 것일 뿐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그제서야 자기들이 아무리 민주선거의 원칙을 배워 실천해봤자 '하늘이 볼까 무서워' 고무신 한 켤레 준 후보에게 투표한 할머니가 받아들인 바로 그 현실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여전히 시험 문제를 풀때는 정답을 쓰겠지만 현실에서는 정답을 다른 식으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이들은 그것으로 세상을 아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그리고 그것을 안다는 사실을 드러내보이는 것이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믿었다.」

 

「 부회장으로 임명된 신화영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가신들은 언제나 신화영을 호위했으며, 바야흐로 아름다운 갑사 한복 속에서 한껏 우월감을 과시하려는 신화영을 무대로 보내기 위해 지금도 신화영을 둘러싸고 앉아 있다. 

 나는 신화영 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간다. 치마에 주름을 많이 넣은 탓에 앉아있는 신화영 주위로 화사한 갑사치마는 둥근 원을 그리고 있다. 나는 한쪽 발로 신화영의 그 신성한 치마끝을 밟고 선다.… 내가 밟고 있는 그애의 치마에서 '찍'하고 찢어지는 소리가 난다. 당황한 그애가 자기의 치마를 내려다보는 사이 나는 또 다른 한쪽 발로 치마를 밟고는 이번에는 내 손으로 그 치마를 쭉 찢어버린다. 완전히 혼비백산한 신화영은 어쩔 줄 모르는데 나는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그 화려한 갑사치마를 찍,찍,찍, 서너 군데 더 찢어 놓았다.

 그때 마이크에서 소리가 울린다. 다음은 성서국민학교의 '흥부전' 강진희 외 아홉 명입니다.

첫 등장 때 흥부 부부는 손을 맞잡고 춤을 추며 나오게 되어 있다. 나는 마이크 소리를 듣자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난생 처음 닥쳐온 엄청난 재앙 앞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신화영의 손을 다짜고짜 낚아 잡고 무대로 나갔다. …아내의 등뒤에 선 흥부는 한 번은 아내의 왼쪽 어깨 위로 한 번은 오른쪽 어깨 위로 고개를 집어 넣으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흥부의 아내도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려 남편과 눈을 맞추면서 어깨춤을 춘다. 나에게 눈을 맞추는 신화영의 거의 울 듯한 표정은 짙은 화장에 가려서 나보다 더 활짝 웃는 것처럼 보인다.」

 

3.  삶과 사랑

 

「 나는 고통을 이길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고통에는 그것을 은근히 즐길 만한 점도 없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벗어나려고 마음먹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마음만 먹으면 고통은 어느 정도는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 할머니는 가끔 이렇게 이모의 응석을 은근히 받아줄 때가 있다.… 할머니가 나의 할머니이기에 앞서 이모의 어머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내게는 어쩔 수 없이 배신감과 질투가 함께 온다. … 이모는 늘 할머니에게 퉁박을 받지 않을 수 없게 행동한다. 반면 나는 언제나 할머니의 마음에 딱 맞는 존재이다.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할머니의 계보에 가까운 것은 분명 이모가 아닌 내 쪽이다. 그런 생각은 내가 할머니의 적자이고 이모는 서자 같다는 느낌을 주면서 정통성을 확보한 나에게 우월감을 심어주었다. 나는 이모의 어리석음을 경원하는 한편으로 이모가 계속 어리석은 서자로 남아 내가 할머니의 사랑이라는 보위에 등극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기를 은근히 기대해 왔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할머니가 마땅히 이모를 야단을 쳐야 할 때 어이없이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면 배신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 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

  할머니의 사랑 중에 고운 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나라면 이모는 물론 미운 정 쪽이다. 이모는 고운 정을 갖기는 틀렸기 때문에 할머니에게서 완전한 사랑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그러나 나는 미운정을 얻기 위해 할머니에게 함부로 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자신이 없다. 어쩌면 미운 정이란 고운 정보다 훨씬 더 얻기 힘든 무르익은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런 장면을 가끔 상상하곤 했다. 기우제 때 처녀를 바치는 제단이 있다. 비가 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무기에게 처녀를 바쳐야 하는데 처녀라고는 이모와 나뿐이다. 이때 할머니는 우리 둘 중에 과연 누구를 그 컴컴한 동굴 속에 집어넣을까.

 그에 대한 내 대답은 놀랍게도 나였다. 

 … 나는 나 자신을 배신감과 질투의 탁류 속에 버려두지는 않는다. 내가 나를 탁류가 아닌 옥류로 데려와 정결하게 씻긴 다음 날개옷을 입히는 방법은 이러하다. 먼저 나는 이무기에게 처녀를 바치는 일은 항상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하고 반문한다. 우리가 흔히 부닥치는 것은 누가 아름답고 누가 아름답지 않은 처녀인가 하는 일상적인 문제이지 어떤 처녀를 죽음의 동굴 속에 집어넣는가 하는 극적인 문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누구를 선택함으로써 누구를 배반해야 하는 극한상황은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다. 이모냐 나냐 하는 기회가 온다면 할머니는 이모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회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다.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다. 그리고 '운명'이라고 부르는 그런 기회는 어디까지나 우연히 오는 것이다.」

 

「 이따금 삼촌이 낮은 목소리로 허석에게 진주만이 어떻고 제국주의가 어떻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내 눈에는 삼촌도 보이지 않는다. 나에게 느껴지는 것은 다만 허석, 그와 밤 숲길과 사과꽃 향기뿐이다. 사과꽃 향기에 싸여 그와 내가 밤 숲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향기가 입혀진 안개의 고운 입자가 허석의 뒷모습을 그대로 감싼다. 그는 향기로운 존재가 되어 밤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누군가가 짓누르고 잇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아파진다.」

 

「 만약 허석의 얘기가 덜 슬프거나 덜 아름다웠다면 오히려 내 마음이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감동하거나 질투하거나 둘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따위의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거짓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변소 문이 보이거나 들쭉날쭉한 빨래가 잔뜩 널려 있어야 '집'이라고 여겨지지 그렇지 않고 깨끗하고 단정하기만 하면 그냥 '건축물'로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사랑이 이해라는 말은 사실인가 보다. 나는 변소에서 나오는 허석을 봤을 때처럼 허석의 싱거운 첫사랑 이야기에도 그다지 실망하지 않는다.」

 

「 그가 다시 온 것이 반갑지 않을 뿐 아니라 실망스럽기까지 하다는 걸 깨닫고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럴 리가 없다. 불과 몇 초 전, 저 대문을 열고 들어서기 직전까지도 나는 그를 얼마나 그리워했는가. 나는 나 자신을 주의깊게 들여다본다. 아무리 보아도 나는 허석과의 예상치 않은 재회를 달가워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아까의 슬픔, 바로 거기에서 이별의 이미지가 완결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팥쥐역을 맡아 지금껏 열심히 연습했는데 갑자기 콩쥐로 배역이 바뀐 것처럼 나는 맥이 빠진다. 그렇게나 몰두해 있던 팥쥐의 감정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면서 콩쥐의 감정에마저 무덤덤해진다. 이별의 슬픔이 무의미해지자 사랑마저 시들해진다는 걸 나는 처음 깨닫는다.」

 

「 사랑이 아무리 집요해도 그것이 스러진 뒤에는 그 자리에 오는 다른 사랑에 의해 완전히 배척당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장소가 가지는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랑, 새로운 사랑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 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가 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나는 그것을 광진테라 아저씨 박광진 씨를 통해서 알았다.」

 

「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상대의 이미지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다. 

 홍기웅은 죽은 어머니가 좋아하던 노래, 그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이모의 모습을 단 한 번 보고 영원한 연인으로 결정해버렸다. 이형렬 역시 이모의 증명사진을 내무반 모두에게 돌려보게 한 다음 거기에서 매겨진 점수에 의해 이모를 '국군의 이상형 여자'로 믿어버렸고 그 이미지에 의해 이모를 사랑하였다. 이모가 쌍꺼풀 수술을 해도 홍기웅의 가슴 속에 있는 이모의 이미지는 손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형렬의 가슴에 있던 이모의 이미지는 심각하게 파손될 수 있다.

 단 한번의 충격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거울처럼 조그만 이미지 하나가 파손되면 그것의 파문은 전체로 퍼진다. … 이형렬은 지금까지 이모의 애교있고 순수하게만 보아왔던 면이 그처럼 어리석고 유치하게 보여진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랄지도 모른다. 청순한 이미지 하나를 잃음으로써 이모의 순수함은 유치함으로 전락되며 진실함은 거머리 같은 아둔함으로 이형렬을 짜증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미운 정'의 깊이까지 가지 못하고 '고운 정'에서 끝나버린 숱한 풋사랑의 파문이기도 하다.」

 

「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그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심장. 그곳은 내 이성이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육체였다. 내 몸을 모두 내 마음대로 정지시킬 수 있건만 심장만은 그럴 수가 없었으며 그 박동은 내 스스로 원치 않는데도 무의미한 열정을 가속시킬 때가 있다. 나는 마치 심장을 쥐어짜듯 작은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 그러나 어른들과 달리 나는 새 삶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 새로 만난 삶이 또 새로운 방법으로 나를 조롱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어차피 그곳에서도 나는 삶을 멀찌감치 두고 보려고 애쓸 것이다. 그뿐이다.… 나는 거리 밖에 있는 내 삶을 그런대로 성실하게 꾸려갈 것이다.…10대에 공부했고 20대에 일했으며, 지난 학기 부터 소도시 전문대학에 자리를 얻었으니 30대에는 그런대로 남들이 말하는 바의 사회적 기반도 잡은 셈이다. 10여 년 넘은 묵은 우정도 몇 가지고 있으며 내 주변에는 깊은 밤이나 잠을 설친 새벽 나의 위로를 불러내기 위해서 내 전화번호를 수첩에 적어 가지고 다니는 다감한 사람이 적어도 열은 넘는다. 내 스무 살 이후 몇 번 되지 않았던 직접선거 때마다 빠짐없이 투표를 하고 재야단체의 서명운동이든 구세군 냄비이든 거리에서 내 애국심과 선의를 물어오는 이들에게 선선히 동조했던 나의 그동안의 삶이 일탈된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나는 내 삶을 방치한 적은 없다. 두 번의 중절수술과 각기 한 번 씩의 둔주, 방화까지를 포함해서.」

 

「 90년대지만 지금도 세상은 나의 유년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여전히 세계 어느 곳에선가는 베트남전이 일어나고 있고 아이들은 선생님에게서 위선과 악의를 배워가며 이형렬들은 군대에서 애인을 구하고 뉴스타일양장점의 계는 깨졌다가 다시 시작되며 신분상승을 위한 미스 리의 교태가 반복되는 한편에서 광진테라 아줌마는 둘째아이를 가짐으로써 뒤웅박 팔자 속에 구덩이를 판다. 정여사의 남편들은 아직도 감옥에 있으며 유지공장의 불 같은 뜻밖의 재난이 끊임없이 사람들을 떼죽음으로 몰아가고 그 사고는 이내 잊혀진 뒤 반복되며 사고가 잊혀진 뒤까지도 그때 대동병원이 번 돈 처럼 돈들은 증식을 계속한다. 그때 젊은이였던 이들이 장년이 된 지금도 요즘 젊은이들이 자신의 젊은 시절과 다르다는 탄식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사랑은 여전히 배신에서부터 시작한다.」

 

「 불현듯 옆으로 시선을 돌려 본다. 줄곧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지 곧바로 그의 눈이 마주쳐온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내 입술에 묻은 맥주 거품을 닦아준다. 손 끝에 온기가 있다. 나는 그의 눈 속을 한참동안 쳐다본다. 건조한 성격으로 살아왔지만 사실 나는 다혈질인지도 모른다. 집착 없이 살아오긴 했지만 사실은 집착으로써 얻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짐짓 한걸음 비껴서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받지 않으려고 주변적인 고통을 견뎌왔으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내게 오는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정열을 다 바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 소설을 기억하는 데 코멘트는 딱히 필요 없을 것 같다. 문장들에 담긴 생각들의 물살 그 자체로 이미 아름다운 완성형을 이루고 있는 것만 같다.

이 한 편의 소설로 은희경 작가는 내 인생 베스트 작가가 되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으로 스며든다. 그 찰나의 순간 순간 담겨져 있는 상념들은 눈을 감고 음미할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열두 살 이후 성장할 필요가 없음은, 소녀가 열 두살이었던 60년대와 30대인 90년, 그리고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속에서도,

그 시간들을 관통하는 삶의 영롱한 자질구레함은 여전하기 때문일테다.

또한 어쩌면, 진희는 미쳐버린 엄마, 잊혀진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그래서 그 운명의 조롱에 일찌감치 스스로 천겹의 보호막을 두르고 있는

여린 소녀 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60년대 시골 마을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서, 그리고 진희의 생각들과 감정들 속에서,

나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위로를 받았다.

나는 별종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다 별종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러므로 상관없을 것이다.

 

 

 

 

 

                                                                                                                                                     새의 선물, 은희경 을 읽고